<녹향월촌 18> / 시와 산문 / 박부민 시인
잔칫날
푹푹 쪄서 잘 눌러둔 돼지 머리고기 닮은 남쪽 마을
떡고물 눈송이도 내려오고
축 김영식 이장 일녀 사법시험 합격
현수막 탱탱하게 걸린 동구 밖
바람도 칼 버리고 줄행랑치는데
이만하면 됐다
그만하면 됐지
소고 치며 노래하며 축하하는 날
온몸 푹푹 쪄 눌리던 일도 이제는 잊거니
가슴 삭히는 서글픔도 조금은 사그라졌거니
어귀에는 종일 세상의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이 더 많아
누구든 한바탕 잘 먹고 놀고 가라는 얘기다
생면부지의 위대한 주인공은 볼 수 없지만
왠지 덩달아 불콰해진 마음
흔한 돼지 머리고기는 뒤로 미루고
쉬큰 삭힌 귀한 홍어나 몇 점 얼른 얻어 먹어볼까
아직도 쪄 누른 것보다 삭힌 것이 더 값나가는 남도 땅
기쁜 듯 아린 눈발 질척이는 마을
너 멋헐라고 여그 왔냐 묻는 이 없기에
지나가다 남 덕에 두둥둥 거저 잔칫날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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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춥고 서러운 시절, 집안에 가장 큰 경사는 자녀들 중 누군가 국가시험에 합격하거나 승진이라도 되는 일이었다. 집안의 어깨를 쭉 펼 수 있는 자랑거리이자 온 동네가 축하해주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특별히 사법시험에라도 합격하면 그것은 누대의 한이 일거에 풀릴 정도의 장원급제와 같은 감격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마을의 광영이니 현수막이라도 내거는 건 당연한 기쁨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온 동네를 위한 잔치를 열고 지나가던 나그네들에게도 무한 관대하게 음식상을 베풀던 시절....
요즘에도 간혹 마을들을 지나다 보면 이런 현수막이 종종 눈에 띄곤 한다. 역시 지금도 사법시험은 온 동네와 지역이 들썩일만한 자랑거리요 축하거리인 것이다. 특히 남도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왜곡된 편견이나 신분이나 지연 학연으로 인한 불이익 없이 자기 힘으로 공부해서 당당하게 출세할 수 있는 돌파구는 아직도 국가고시 같은 관문에 합격하는 길 뿐이라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 꼭 그런 경사만이 함께 축하할 자랑거리일까? 속으로 오래 삭힌 남도의 한이 근본적으로 풀릴 날은 언제일까? 남 덕에 잔칫상에 앉아 얻어먹으면서도 기쁨과 서글픔이 가슴 속의 눈발에 섞여 질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 언제나 사법시험 합격이 한풀이가 아닌 평범한 일이 될까? 언제나 ‘축 양촌리 응삼이 시집 출판’ 이런 현수막이 더 많이 내걸리는 이 나라 이 땅이 될까? 이번 겨울도 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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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부민 시인 / 1996년 계간 <시와산문> 신인상 당선 (조병화 시인 選) 2005년 한국크리스챤문학상 수상. 시집『등불이 있는 마을』(시와문화 2010) 현 남도햇빛교회 담임목사 nasaret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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