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신탄탄(漆身呑炭)
최근 들른 미술관에서 ‘顧護(고호)하다’라는 말을 만났다. 돌아볼 顧에 돌보아 줄 護이니 누군가를 포근히 감싸 안아 보듬는 사랑의 용어가 아닌가. 그토록 자신을 고호해 주던 이와의 돌연한 결별이라니! 모든 사랑은 남은 자에게 흔적을 남긴다. 상대가 남긴 지독한 그리움의 물살에 휩쓸려 제 온 몸을 내던진 사내에 얽힌 일화다. 몸에 옻칠을 하여 문둥이 형상을 꾸미고 숯을 삼키어 벙어리 행세를 한다는 漆身呑炭은 저를 알아보아 준 옛 은인의 복수를 위하여 제 몸을 바친 예양(豫讓)에 얽힌 사자성어다.
춘추 말기 진(晋)의 왕실은 覇者(패자)의 면목을 잃고 나라의 실권은 지백(智伯), 조(趙), 한(韓), 위(魏) 등의 공경들에게로 옮겨갔다. 그 치열한 公卿들의 세력 다툼에서 실권을 잡은 이는 지백이었다. 하지만 승승장구 세력을 넓혀가던 지백은 뜻밖의 패배를 맞아 죽고 만다. 춘추시대 통틀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참으로 불가사의한 전투였다는 기록만을 남긴 채.
그 휘하에 예양이 있었다. 그는 主君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호시탐탐 趙襄子(조양자)의 목숨을 노린다. 오로지 그 목적 하나로 예양은 자신을 죄수의 신분으로까지 떨어뜨려 조양자가 머무는 궁전의 미장이로 들어갔다. 이윽고 절호의 기회가 왔다. 늦은 밤 조양자가 변소를 가는 틈을 노려 뒤 따라 들어가 칼을 겨누었으나 결국 잡히고 말았다.
“내 알기로 너는 이리저리 여러 사람을 모신다는 명목으로 떠돌다가 지백의 휘하로 들어갔지 않느냐?”
이 손 저 손 거친 그리 순결치 못한 편력을 가진 주제에 웬 地高至純 흉내냐는 조양자의 힐책이다.
“맞다. 그동안 내가 거친 몇 몇들은 나를 일개 식객으로만 대해 주었다. 하지만 지백님 만이 유일하게 나를 國師로 대접해 주셨다. 그래서 나도 국사로서의 예를 다하려는 것이다.”
조양자는 예양의 기백을 높이 사 ‘忠臣義士’라는 덕담과 함께 조건 없이 放免(방면)했다.
그러나 예양은 그 후로도 복수의 화신인양 계속해서 조양자를 노렸다. 제 얼굴을 아는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몸에 옻칠을 하여 문둥이 형상이 되게 하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숯을 삼켜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까지. 매일 구걸로 연명하며 조양자의 동정을 살핀 것이다. 그런 그를 아내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단 그의 정체를 알아 본 어린 시절의 친구가 조양자의 신하로 들어가 좀 더 편안히 복수의 기회를 엿볼 것을 권했지만 예양은 단호히 대답했다.
“그것은 두 마음을 갖는 것이 된다. 자신이 하려는 일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후세 사람들에게 두 마음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이고 싶다.”
예양은 마침내 다리 밑에 엎드려 그곳을 지나게 될 조양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주인을 해치려는 기척을 눈치 챈 조양자의 명마였다. 다리 입구에 이르러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는 말. 그를 수상쩍게 생각한 조양자는 수행원들에게 철저한 주변조사를 지시했다. 문둥이에, 벙어리요, 걸인 행색의 예양이 포박되어 조양자와 재회했다.
“그대는 이미 舊主(구주)에게 할 일을 다했다. 나 또한 그대에게 충분한 禮를 다했다. 그런데 아직도 나를 노리다니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다.”
조양자의 서슬 퍼런 질책에 예양은 처형되기 직전 한 가지 소원을 내밀었다. 조양자가 입었던 옷을 벗어 달라 요구한 것이다. 조양자의 옷을 건네받기 무섭게 옷을 향해 비수를 찌르기 세 번,
“지백님이시여! 이제 복수를 마쳤습니다.”
크게 외친 후 자신의 배를 찔러 그 자리에서 엎드려 죽었다.
니이체는 ‘자기 확신이야말로 거짓말보다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고까지 했다. ‘누구나 여름날의 파리처럼 자기만의 편리한 신념에 빠진다’고 지적한 건 러셀이다. 신념을 지키되 주제 넘는 생각이라면 포기할 준비를 하라는 현실적 조언도 들린다. 하지만 유일무이한 한 사람, 그를 기리는 올곧은 마음 한 줄기를 어찌 욕망이라는 국물에 달려드는 파리의 행위와 비교하랴. 생이라는 허허벌판에서 마주친 인연들이 한 둘이었던가. 그 숱한 인연 중 결코 예사롭지 않은 그대, 그 특별한 만남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제까지 걸어왔던 타성의 생, 그 향방을 바꾸게 하는 것이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굴욕도 감내하리라 맹세케 한다. 무릎 꿇음을 넘어 그를 향한 五體投肢, 나마스테다. 그를 향한 황홀한 仰望에 남은 생애를 건다.
첩첩 산골이라도 좋다. 영원히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찌그러진 양푼에 토막 난 수저로 연명하여도 그대, 그대와 함께라면 나는 족하다는 우둔한 사랑고백이 절로 나온다. 문득 떠오른 養愚(양우)다. 直譯(직역)은 우둔함 키우기, 뜻하기는 ‘바보처럼 살기’라던가. 나는 그대에게 이미 눈 멀어버린 바보이니 그대여 이런 나를 끝까지 내치지만 말아주시라. 지백을 향한 지독히 사랑에 빠진 미련퉁이 사내, 그렇지만 유독 형형했을 예양의 눈빛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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