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강진에서 광주까지 자전거 타고 오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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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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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서 광주까지 자전거 타고 오신 아버지
(전 강진군수 강진원)

  

송강호씨가 주연한 택시 운전사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실제로 김사복이라는 분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분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독일 외신 기자 힌츠페터씨에게 택시 운전사로 함께 동행하며 촬영을 도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5.18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었지만, 광주 속으로 뛰어든 평범한 한 인간. 김사복. 그가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전쟁터 같던 광주에 뛰어들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나의 아버지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2학년 때, 대학생들은 군사정권 저지를 위해 연일 독재타도와 민주화를 외쳐댔고, 이에 맞불을 놓은 군사정권은 비상계엄령과 모든 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휴교령과 함께, 나는 힘든 마음을 내려놓고 싶은 맘으로 부모님이 계시는 강진으로 향했다. 그 시절에는 강진으로 바로 가는 차편이 없어, 광주를 들렀어야 했는데, 버스는 광주터미널에 들어서지 못하고, 군인들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 그 당시, 광주는 5.18민주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였다. 난 그렇게 버스에서 강제 하차 당하면서 광주 5.18 민주 항쟁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당시 20살 청년이었던 나는 광주의 참상에 분노하며, 5.18 민주 항쟁에 함께 나섰다. 그건 내가 특별해서도 아니고, 잘나서도 아니고, 눈물 때문이었다. 그때, 광주 시민들은 밤낮으로 모두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을 뒤로 하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도 그 중 하나일 뿐이었고, 당시 20대의 심장이었으니 오죽 뜨거웠으랴!

어느 날, 광주에서 자취하는 동생과 함께 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전남대 후문에서 실시하는 검문을 피하기 위해, 광주-순천간 고속도로(현재 제2순환도로)를 막 횡단하려는데, 고속도로 양쪽에 잠복해 있던 한 군인이 불쑥 튀어나와 동생과 내 머리를 향하여 총구를 들이댔다. 그는 우리의 몸을 수색하며 신원을 물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입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재수생이고, 동생은 고등학생인데, 쌀이 떨어져 시골 부모님 댁으로 가려다 차편이 없어 다시 돌아가는 길이라고 둘러댔다. 군인은 총구를 겨눈 채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말라며 우리를 보내줬다. 총구를 등 뒤로 한 채 걷는데, 내 심장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였다. 행여나 하는 맘에 동생을 내 앞에 세워 걸어가는 시간이 십 수 년처럼 느껴졌다. 이 일로 나는 동생과 함께 밖에 나다니지 않았다. 두려웠다. 도청 앞 시위를 할 때도, 트럭을 타고 나주 남평 파출소 무기고를 털 때도 두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눈앞에 군인들을 태운 장갑차가 내 쪽을 향해 발포하려 할 때의 공포와도 다른 차원의 두려움이었다. 그건, 나 때문에 가족이 잘못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던 때라, 그 생각은 사그라 들지 않았다. 다음 날 동생을 강진 부모님 댁에 먼저 내려 보냈다.

그 다음날 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집 문을 쾅쾅 두드렸다. 목소리는 다급했다. 아버지셨다. 날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셨는지,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동안 숨을 몰아쉬셨다.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무엇 때문에 강진에서 이곳까지 오셨는지 짐작 할 수 있었다. 동생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내 걱정에 자전거에 오르셨다. 광주에 들어갈 수 있는 차가 없으니, 강진에서 자전거로 오신 것이다. 보진 않았지만, 쉼 없이 페달을 밟고 밟았으리라. 그래도 아버지 맘에는 미치지 못했으리라. 그 날 밤 아버지와 난 아무 말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돌아 누우신 아버지의 등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다음날, 모든 생각을 뒤로 한 채 강진으로 다시 돌아가는 아버지 자전거에 올라탔다. 지금이야 도로 사정이 좋지만, 그 당시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도로였다. 자갈과 고르지 못한 길 위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 건 많은 인내심과 체력을 요했다. 가는 내내 그 길을 혼자 오셨을 연로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코끝이 몇 번이나 시큰해졌다. 물론, 아버지께서는 김사복씨처럼 대의를 위한 사명감으로 내게 오시진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절실함에 있어서는 그에 못지 않으셨을 것이 분명하다. 혈혈단신에 자전거 하나 끌고, 광주로 향하실 때에는 이미 당신의 안위는 잊으셨을거다. 나 또한 그 마음을 저버릴 수 없어 광주를 뒤로 하고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하지만 발길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마음 또한 아셨으리라. 그래서, 침묵하셨으리라.

이제 내가 그 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자전거는 추억이고 낭만이고, 노래 일 수 있다. 하지만 내게 자전거는 아버지의 애끓는 부정과 고단한 등이며 내 젊은 날의 고뇌이다. 마음이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자전거를 보고, 만질 때면 40년 전 아버지의 그 마음이 보이고 만져진다. 지금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르신의 뒷모습을 볼 때면 그 때의 기억들로 아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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