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랑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
내 집 고양이 점동이의 가출에 대해 말들이 많다. 해질녘은 물론이요, 새벽에 자다 깨어 호명하기 몇 번인 내 지나친 집착도 눈총감이지만 결국 바람이 났다는 걸로, 그러니까 제 짝을 찾아 먼 길 나섰다는 걸로 중론이 모아졌다.
짜식, 그토록 애정을 쏟았건만 한 마디 통고도 없이 집을 떠난 점동이를 향한 씁쓸한 배신감인가. 어느 할머니의 회고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스물에 만나 겨우 6년을 함께 지낸 남편이었다. 장에 가면 아내의 화장품과 장신구, 군입거리에 가지고간 돈을 몽땅 털고 오기 일쑤요,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첫 딸을 낳은 아내에게 퍼붓는 어머니의 공박이었다. 그런데 당사자는 얼마나 속이 더 상하겠느냐는 한 마디 말로 고부간의 갈등을 넉넉히 막아주던 자상한 남편이었다. 그런 부부금슬 덕택인지 망구(望九)에 이르도록 남쪽의 할머니는 수절하셨다. 졸지에 잃은 딸조차 가슴에 묻고 살아 온 신산한 삶, 반면 이산가족 상봉으로 극적으로 해후한 이북의 할아버지는 재혼해 다섯 자식까지 두셨다는데... . 사람 기다리는 게 뼈 녹아내리는 일이라던 할머니는 기자가 들이미는 두 분의 상봉 당시 대화 장면, 그러니까 명백한 자료화면에도 할아버지의 재혼 사실을 극구 부인하셨다.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을 했네.’ ‘그건 너’의 이 가사는 평범한 일상어를 노래말로 등장시킨 파격적 시도로 화제를 모았다. 주머니 가득 동전을 바꿔 공중전화에 매달리던, 이제는 아득한 전설 같은 구시대의 사랑법이 아직도 유효한가. 최근 발표한 이적이라는 가수의 실연 후 공허감을 읊은 노래에도 ‘빨래하려고 해, 날씨는 좋으려나’라는 가사말이 등장한다니, 맞다. 손에 잡힌 전화와 날마다 해야 하는 빨래처럼 사랑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기도 하다.
평생 130명의 여성과 결혼한 케냐의 한 남성이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해외토픽이다. 여성들이 거절하기 힘든 잘 생긴 외모와 멋들어진 옷맵시, 그래서 그에게는 ‘위험인물’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단다. 남자는 되도록 많은 씨를 뿌리려하는 경작자의 기질이 팽배하고 여자는 되도록 우수한 종자를 받으려는 밭의 기질을 지니고 있다던가. 풍요의 남신 포로스와 결핍의 여인 페니아가 결합해 낳은 딸이 사랑의 신인 에로스라는 희랍신화의 설정도 흥미롭다.
‘옛날에, 이름이 시링크스라는 요정이 있었대요. 그녀는 숲의 요정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지요. 그런데 그녀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아르테미스 여신만을 숭배하여 그분의 사냥길만을 쫓아다녔대요. 사냥옷을 차려입은 시링크스 모습은 아르테미스의 모습만큼 아름다워 모두들 둘을 혼동할 정도였지요. 다른 점이 있다면 시링크스의 활은 각질, 반면 아르테미스 여신의 활은 은으로 만들어진 차이 뿐. 그러던 어느 날 시링크스는 자신을 짝사랑하던 핀을 만납니다. 핀은 여느 때처럼 시링크스를 향해 온갖 달콤한 말로 유혹하기 시작하고. 시링크스는 그를 피해 달아납니다. 강가에 이르러 마침내 핀의 손아귀에 잡힐 듯한 위기에 처한 시링크스는 친구인 물의 요정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핀이 시링크스를 껴안는 순간 요정들은 그녀를 갈대로 둔갑 시킵니다. 핀은 탄식했고 그 탄식은 갈대 줄기에서 공명을 일으켜 아주 슬픈 목소리로 변했답니다. 그 소리의 청아함에 취한 핀은 몇 개의 갈대 줄기를 다듬어 악기를 만들어 지니고 다닙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요정의 이름을 딴 갈대피리에 시링크스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체취가 묻은 것이라면 지푸라기라도 간직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이 어찌 핀뿐이랴. 비록 허구인 신화일지라도 사랑의 이야기라면 절로 귀가 기울여지는 까닭도 우리에게 영원불변하는 사랑의 열망 때문이리라. 저를 챙겨주던 주인과 제 피붙이가 뛰노는 정든 마당을 미련 없이 떠난 점동이. 녀석의 거역할 수 없는 강한 욕구도 사랑이려니 문득 떠오른 게 밈(Meme) 이라는 단어다. 누군가를 모방하면 그 사람에게서 내게로 무언가가 전달되고 또 나의 그 무언가도 상대방에게 전달되니 서로 교류하는 이 무언가가 바로 밈이란다. 애초 농경이든 도구제작이든 최고를 모방하는 것이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었다. 더 나은 모방자를 찾아 그 능력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압력이 인간 특유의 큰 뇌로 발전, 하여 사람은 틈만 나면 매력적인 상대를 찾아 두리번댄다던가. 다른 종과 달리 번식의 목적을 배제한 섹스가 가능한 것도 이 밈 때문이란다. 어쨌든 우리에게 가장 자유롭고 행복하고 영적인 기운이 창궐하게 하는 게 사랑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케냐의 초능력 사나이와는 달리 오로지 한 상대를 향한 영원한 동경과 열병적 그리움이 주 증상인 우리 범인(凡人)들의 사랑. 그 고전적 사랑은 오래전 실종되었는가. 갈수록 거래로 치닫는 사랑과 결혼풍속도다. 결혼기피에 따른 심각한 폐해를 줄이기 위해 설립된 공공단체의 결혼중개 사이트에서조차 부모의 직업, 부의 정도 등등, 지닌 조건에 따라 배우자감의 등급이 엄격히 매겨져있다니.
우리의 순수한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가 한 둘이랴. 달콤한 고통이자 쓰라린 기쁨이라던 사랑, 그것은 때때로 한사람의 생을 쥐락펴락하는 위력도 발휘하지 않던가. 누가 뭐래도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소소한 일상적 관심과 상대의 모든 악조건을 뛰어넘는 파격이 사랑의 정석이라 믿고 싶다. 청정하게 해맑아 모두가 착한 영혼으로 회귀할 것 같은 이 가을, 청명한 대기의 기운처럼 점동이를 비롯해 모두가 꿈꾸는 올곧은 사랑이 부디 좋은 결실을 맺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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