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작살나무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원)
회진리는 내가 꿈꾸던 마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곳에 내 집을 짓는 동안 나는 땡볕을 피해가며 현장을 지켰다. 그리고 틈만 나면 마을 이곳저곳을 탐색하듯 쏘다녔는데 백년은 족히 넘었을 수령의, 방죽가에 자리해 휘늘어져 가지의 꽃무더기가 그대로 얼비치는 빼어난 자태의 정향나무도 그때 만났다. 세로소지음(世路少知音)이더라고, 이 작고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나무라고 무료하지 않았겠는가. 궁여지책 바람에 흔들리는 저를 바라보다가 가멸 없이 나르시즘에라도 빠질 수밖에. 그 호젓한 탑골에서다. 잎을 모두 떨친 앙상한 줄기에 매달린 성냥 꼬투리 모양의 자색 열매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건드리자마자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알갱이들을 호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기 며칠, 통성명도 못하고 스친 순간의 인연이랄까. 다음 해도, 다음 해도 만날 수 없던, 흔적 없이 사라진 나무에 대한 아쉬움이라니.
산을 깎아내고 조성한 듯 아들네 아파트는 여느 단지들과 달리 도심에서 멀찍하여 청량한 기운이 돈다. 산보길 외벽삼아 두른 나무들을 둘러보던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십년 넘어 해후한 나무는 ‘좀작살나무’라는 표찰까지 달고 나를 맞았다.
“자아, 이제 우리 원 없이 만납시다.”
이런 친절을 베풀 듯 무리 지어 심어져 있는 좀작살나무는 열매까지 오달지게 달려있다. ‘시는 나 같은 바보가 짓지만 나무를 만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던 J, 킬머의 말 아니래도 갈수록 만물이 제 형상자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연은 곳곳에 새겨놓은 하늘의 글씨라 했다.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세계, 그 거대한 경계를 여는 열쇠는 지극한 겸손한 자세를 갖춘 마음의 응시 아닐까. 모름지기 소나무에 듣는 바람소리도 읽을 정도로 네 귀를 열어라. 이른바 풍입송(風入松)의 경지를 즐길 경지, 그에 이르진 못할지라도 은밀히 새겨진 하늘의 글씨를 두리번대지만 빠꼼히 열린 쪽문을 기웃거리는 수준. 매달 초하루날 잎이 돋기 시작해 날마다 한 잎씩, 이윽고 보름날이면 15개, 그리고 16일 째부터는 날마다 한 잎씩 떨어져 그믐날 모두 떨어지는 명협이라는 풀이 있다던가. 해서 달력대용으로 쓰였다는 역초(歷草)는 너무도 쉽게 풀리는 해득 기호였다. 학명이 'Purple beauty berry' 꿀물과로 마편초과 작살나무 속(屬), 아시아의 산기슭에 자라는 1m 50cm의 관목(灌木). 작다는 뜻의 ‘좀’이 성(姓)씨처럼 붙은 나무에 숨긴 그 분의 비의(秘意)는 무얼까.
또록또록 선명한 보라색의 열매가 스윽 그으면 화르륵 불꽃이 일 것 같던 그날의 성냥개피가 문득 검붉은 멍빛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또 뭐람. 외부로부터 가격 당한 상처이되 겉으로 표출되지 못한 울혈이 멍이라면 어디서 다친 지도 모르게 시퍼렇게 자리 잡은 생의 멍이 든 이 한 둘이던가. 돌이켜 보면 매양 허겁지겁 제 몸 천천히 살필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입이 있어도 차마 말을 못하고 아파도 아프다 속 시원히 말을 못하던.
뜻밖에 좀작살나무를 재회한 오늘, 기필코 보라색을 만끽하리라 작정한 것처럼 보라색 잔에 커피를 탔다. 어느 해던가. 당신 눈 밝을 때 세 딸들에게 손수 지어주시겠다던 친정어머니의 모시적삼 중 하필 보라색을 추켜들자 그런 서러운 색깔을 좋아하면 그런 신세가 된다고 나무라셨던가. 보라색은 항상 조바심으로 안달 나게 하는 빛깔이었다. 정성에 정성을 쏟았어도 뜰에서 자취를 감추어버리는 보라색 과꽃도 그렇고, 흰색으로 피었다가 진보라색이 되면 꽃송이 째 툭 떨어지는 짧은 개화의 발렌타인도 마찬가지였다. 산후조리 중인 며느리를 대신해 두 손녀를 거두는, 때 아닌 한가함의 여유인가, 어린아이가 아프다고 칭얼대는 모습은 귀엽지만 어른이 되어 아프다고 보채는 모습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고 했건만 뒤늦게 돌아보게 되는 누군가의 알싸한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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