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만 햇발
궁핍한 날의 벗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
대광주리에 남은 쌈채를 차마 버리질 못하겠다. 용감무쌍 겨울을 견딘 그 씩씩한 기상, 그 뻣뻣한 기세를 죽이려 궁여지책 소금물에 삶았다. 젓갈에 무친 첫 봄의 맛이랄까. 여전히 톡 쏘는 아린 맛은 별미였다.
도대체 해를 본 적이 언제일까 싶게 잦은 비다. 그에 따른 이상저온으로 채소 값이 폭등했다. 어디 채소값 뿐인가. 뭐, 뭐, 뭐가 지난 해 대비 몇 %로 치솟았다는 보도의 화면을 접할 때마다 부쩍부쩍 겁이 난다. 좀 더 무장을 단단히 해야겠다 다짐하는 전투병사의 긴장감으로 내모는 현실, 이럴 때 책이야말로 좋은 피난처다.
명사들에게 묻는 내 인생 한 권의 책이다. 어느 이는 ‘사기열전’을, 어느 이는 ‘논어’를, 어느 이는 ‘콜래보 경제학’을 꼽았다. 뒤숭숭한 시절 탓인가. 그 중 내 눈길을 끄는 건 ‘한결같음의 위력, 맑은 영혼이 그리울 때 드는 책’이라는 감회로 소설가가 추천한 박제가의 ‘궁핍한 날의 벗’이다.
생활고를 못 이겨 식솔들을 이끌고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기린협으로 떠나는 벗, 백영숙을 위해 쓴 융숭 깊은 경어체의 송별사다. 백영숙의 호가 야뇌당(野餒堂), ‘들에서 굶주리는 사람’이니 신산한 그의 처지가 엿보이지 않은가.
‘천하에서 가장 친밀한 벗으로는 곤궁할 때에 사귄 벗을 말하고, 우정의 깊이를 말한 것으로는 가난을 상의한 일을 꼽습니다. 벗이란 술잔을 잡고 은근한 정을 나누며 손을 부여잡고 무릎을 가까이하여 앉은 자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곤궁할 때의 벗을 가장 좋은 벗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허물이 없고 시시콜콜한 관계를 경시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처한 사정이 같은 고로 지위나 신분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근심하는 바가 같은 고로 서로의 딱한 처지를 잘 이해한 것뿐이지요. 대개는 서글픔으로 인하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실의와 비감에 차서 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때는 친구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안부를 묻곤 하루 종일 아무 말 없이 베개를 청하여 한잠 늘어지게 자고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과 십 년간 사귀며 나눈 대화보다 낫지 않습니까?’
적정한 온도가 아니면 녹아 없어질 초콜릿의 운명과 같은 물성을 타고 난 것이 인간의 삶이라 했다. 이 유한한 삶에서 건질 가장 큰 덕목은 타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 아닐까. 나는 묵은 노트를 뒤적여 이 시를 겨우 찾아내었다.
몰골만 겨우 사람꼴인/밤 어두운 길에서/만났더라면/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 지만/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유월 숲 속 같아/나라도 피기침 늑막 차오른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산가시네 되어 독 오른 뱀을 잡고/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후후 불어 먹이고 싶었네/저 미칠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 같이 눕히고 싶었네/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내 허벅살 선지피라도 먹이고 싶은 내 사내.
아닌 게 아니라 세상은 폐병 앓는 사내처럼 콜록거린다. 그 쇠약한 사내에게 제 허벅살 베어 먹이려는 맑은 심성 지닌 여자의 상상은 흐뭇하다. ‘연민을 뗏목 삼아 섬처럼 고립된 타자에게 건너가 슬픔만한 거름이 없음을 발견하는 것, 그 눈빛 병든 사내와 나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아픔들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 이 도저한 모음을 달여 만든 진국’이라는 시평(詩評)이 압권이다.
눈을 확 당기는 원색 화보다. 제작소의 설립배경에 주소까지 꼼꼼히 곁들인 친절을 베풀었다. 무려 여섯 페이지를 할애한 신문의 명품시계 소개다. 겨우 1달러가 없어 어린 생명이 사위어간다는 호소에도 아랑곳없이 애호가들은 지갑을 연다.
사람이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면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다는 시계의 역사다. 마니아라고 할 만큼 시계라는 물건에 매료됐던 이들은 장인(匠人)의 솜씨를 빌어 자신만을 위한 시계에 집착했다. 이제 저 위대한 나폴레옹도, 번쩍이는 장신구의 엘비스 프레슬리도 묵은 서가에서만 존재한다. 160번이라는 고유번호가 붙었던가. 1783년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시계는 그녀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후에야 완성되었다. 예루살렘 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그 명품시계는 정확히 200년 뒤 도난당했다.
우리에게 허여된 시간동안 우리가 기필코 이루려던 것은 무엇인가. 바란다면 겨울 이겨낸 채소 한 잎에도 감사하는 날이 많아지기를, 우리가 더 가난하여지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궁핍한 날 따뜻이 다가가는 벗의 마음을 회복하기를, 그것이야말로 이 쓸쓸한 세상을 견디는 우리의 별미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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