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 연재 6
붉은 강물에 내 마음 씻으리(3)
황상은 대흥사 대웅전에 들려 삼존불(三尊佛)과 신중탱화를 향해 오체투지로 삼배를 올렸다. 석가삼존(釋迦三尊)을 위시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 응진전에도 들려 삼배를 올렸다. 응진전 바로 옆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을 바라보며 대흥사야말로 천년고찰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표충사(表忠詞)의 당우(堂宇)는 산내암자로 향하는 숲 가까이에 있었다. 말 그대로 사당(祠堂)인 표충사에는 서산대사(西山大師)와 그의 제자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서산대사의 유지를 받들어 여러 유품이 모셔져 있었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큰 공을 세운 분이었다. 그래서 정조대왕이 하사한 금병풍과 평소에 사용했던 의발이며 서산대사 교지, 승병단 표지물, 철제 방패 등 수 십 종류의 유품이 바로 표충사에 모셔져 있었다.
서산대사는 입적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의발을 대둔사에 전할 것을 명했는데, 제자들이 왜 남도 땅 끄트머리에 자리한 대흥사를 택했는지 그 영문을 모르고 묻자,
“비록 두륜산은 해안 한 구석에 있고 또 명산도 아니다. 그러나
첫째,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항상 아름답고 옷감과 먹을 것이 항시 끊이지 않는 곳이다. 북으로는 월출산이 있어 하늘을 괴는 기둥이 되고 있고, 남에는 달마산이 있어 지축(地軸)에 튼튼히 연결되어 있으며, 동의 천관산, 서의 선은산(仙隱山)이 홀연히 마주 솟아 있다. 바다와 산이 둘러싸 지키고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니 이곳은 만세토록 이어질 땅이다. 둘째는 넓은 천하가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지만 나라를 향한 충성을 힘써 바치기가 어려울진대 내 공적을 누가 말할만하다 하지 않겠느냐. 성주(聖主)께서 내리시는 깊은 은혜가 이 때문에 느껴진다면 후세에 저 무표정한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소린들 어찌 우미한 속세를 경고하지 않겠는가?
셋째는 처영(處英)과 나의 제자들이 모두 남쪽에 있고, 또 내가 출가하여 부처님의 법을 들은 곳이 두륜산이다. 이 세 가지 이유로 뜻을 정했으니 나의 의발과 주상(主上)이 하사하신 대선사(大禪師)의 교지(敎旨)를 두륜산에 이장하여 내가 입적하는 날 날 이곳에 모시도록 하라”
이 말을 들은 제자 명조(明照)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유지를 받들었는데, 대흥사에 이 같은 서산대사의 진영과 함께 유품이 모셔져 있다는 사실에 황상은 충격이었다. 황상이 느꼈던 것처럼 스승 다산은 나중 「민의보」를 저술하면서 대둔산 축성론을 주장했다. 강진에 있는 전라병영성의 불리한 조건은 주변에 아군의 동태를 엿볼 수 있는 산봉우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만일 적이 산봉우리에 올라가 아군을 관찰한다면 적을 막아내기가 어렵다는 거였다. 그러나 대둔산이야말로 서산대사의 말처럼 바다와 산이 둘러싸여 있고 골짜기는 깊으니 천하의 요새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사실 두륜산은 호로병 형국이기도 했다. 사하촌 장춘동 계곡이 호로병 입구라면 갈수록 넓어지는 대웅전과 표충사는 호로병 속인 셈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나 장춘동을 거치지 않을 수 없고, 나갈 때도 장춘동을 거쳐야만 하는 호로병 산세였으므로 서산대사는 만고의 숨은 땅이 곧 두륜산이라고 했던 것이다.
“과연 듣던 대로 명찰(名刹)이네.”
황상은 학연과 함께 표충사를 둘러보고 났을 때 대웅전 옆 범종각에서 저녁예불을 알리는 범종소리가 들려왔다.
둥우우우우.
범종소리는 산내암자가 수박씨처럼 흩어진 산 계곡을 울렸다. 웅장한 범종소리는 은은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는데,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미물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절로 신심(信心)이 우러나게 하고 있었다. 큰절에서 하룻밤을 자고나서 이른 아침 절 구경을 더 한 후에 올라오라는 혜장 스님의 말에 황상과 학연은 대웅전 옆 요사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겨울의 짧은 햇빛은 숨을 서서히 거두고 있었고 산속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금세 사방은 어둑해졌다. 온돌방은 따끈따끈했지만 창호지문 밖으로는 밤새도록 바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바람이 드세어질 때면 풍경소리가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다음 날 새벽, 대웅전 가까이에서 잠을 잔 탓에 목어(木魚)를 울리고 법고(法鼓)를 두드리며 운판(雲阪)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범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날이 새려면 아직 먼 시각인데도 절에서는 모든 사물의 잠을 깨우고 있었다.
색성이란 젊은 스님이 황상과 학연에게 안내하겠으니 따라오라고 말했다. 혜장 스님은 상원암(上院庵)에 계시므로 앞장을 서겠다는 것이었다. 신월암을 거쳐 상원암을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한겨울인데도 계곡은 계류가 풍부하게 흐르고 있었다. 잡목숲으로 된 두륜산은 모든 나무가 발가벗고 있었지만, 그 계류 소리로 인해 웅장한 산의 기운이 느껴졌다. 낙엽은 발이 푹푹 빠질 만큼 산의 어디에고 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신월암에서 잠시 머무른 후 다시 상원암을 향해 걸음을 겼다. 상원암은 코딱지처럼 작은 암자였다. 혜장 스님이 두 사람을 반겨 맞이했다. 이내 점심공양 때가 되자 텃밭의 채소로 만든 반찬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가까운 곳에 있는 진불암(眞佛庵)엘 망해대사(望海大士)와 함께 가보기도 하고 다시 되돌아와 저녁 공양을 한 후 이틀째 밤을 보냈다.
다음 날은 두륜산 정상을 향해 본격적인 등산이었다. 그 정상을 가는 길에 진초록 신우대 숲으로 둘러싸여진 북암(北庵)이 있었는데, 그곳엘 들렸더니 뜻밖에도 법의를 양어깨에 다 덮은 통견의(通肩衣)의 거대한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있었다. 보살(菩薩)은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여래가 되기를 보류한 채 현세에 남아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여래는 부처를 말한다. 부처, 곧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자(覺者)이자, 여래(如來)이다.
마애불은 별다른 개성이 엿보이지 않으면서도 귀가 어깨에 내려와 있고, 하늘의 천동(天童) 과 천녀(天女) 내려와 있는 마애불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 바람과 비바람과 온갖 풍우를 견뎌내고 있었다. 황상 일행은 내친김에 만일암까지 들린 후 정상인 가련봉을 오르기 전 황상과 학연은 갓끈을 풀고 두루마기를 벗었다.
가련봉 정상에 오르자 질펀한 들판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과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발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강진 읍성과 보은산까지 보이는 것이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툭 트인 바다는 머리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주고 있는데, 학연이 「가련봉 절정에 올라서서」란 시를 읊었다. 하늘 바람이 소매를 휘불어가니 절정에서 한 차례 큰 숨을 내쉰다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시는 대자연 앞에서 사람은 그지없이 작고 하찮은 존재임을 느낀다는 내용이었다.
일행은 이제 두륜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황상은 잘도 올라갔지만 학연은 특히 구름다리를 건널 때 몸을 떨었다. 그러나 황상은 쉽게 구름다리를 건넌 대신 학연은 벌벌 떨며 기어가다시피 간신히 건넜다. 황상이 담력과 체력을 내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날 진불암에서 잠을 잔 황상은 다음 날 일찍 학연과 함께 강진으로 향했다. 대흥사 십리 숲길을 빠져나와 강진까지 걸어오면서 비를 흠뻑 맞기도 했지만 즐겁고 충격적이었으며 한바탕 꿈 속을 헤매고 온 양 가슴이 들뜬 3박4일의 여정이었다. 혜장 스님은 몸이 불편함에도 두 사람을 위해 손수 구름다리까지 동행할 만큼 극진하게 대해 주었고, 밤이면 함께 담소를 나누는 등 특별한 대접을 해주었던 것이다.
백적동의 봄.
바야흐로 봄기운이 완연하자 백적동 사람들은 너나없이 긴 겨울의 지루함을 떨쳐버리고 논과 밭으로 나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때 이르게 소를 몰고 층층대처럼 바투바투 잇대어 있는 논이나 밭을 가는 사람도 보였고, 손등만한 남새밭, 따비밭이나 자드락밭에서 종일 호미로 풀을 뽑는 아낙네들도 보였다. 지난 해 장마 때 방천이 난 어래미논을 고치기 위해 무거운 돌을 짊어져 나르느라 비지땀을 흘리는 사람도 보였다.
긴 겨울 동안 집채만큼 쌓아 놓은 나뭇단이 바닥나자 바지게를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가 이제 막 뿌리에 물이 올라오는 철쭉 같은 등걸나무를 해가지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고사리를 비롯해서 취나물, 쑥, 두릅, 달래, 봄동, 냉이 등을 캐서 마량장이며 읍내 장까지 새벽걸음을 재촉해 푼돈이라도 만져보려는 사람들의 바지런한 발걸음도 봄을 활기차게 만들고 있었다.
황상은 아침 해가 백적산 위로 떠오르자 아내와 함께 괭이를 들고 자드락밭을 향해 걸어 나갔다. 봄기운 탓인지 아내는 호미를 들고 풀을 매는 동안 황상은 괭이를 높이 쳐들고 땅을 내리찍었다.
이곳 백적동에 온 지도 어언 18년. 그 세월을 한 눈 한 번 파는 법 없이 살아온 세월이었다. <제황상유인첩>대로 살기 위해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던 황상이었다. 문득 스승 다산으로부터 <황상유인첩>을 받았던 감격스러운 일이 떠올랐다. 스승 다산이 맏아들 정학연이 찾아와 함께 고성암에서 함께 지낼 때 <주역>과 예학을 공부했는데, 그 때 <주역>을 공부하다가 유인(幽人)의 삶을 말하게 되었다.
“스승님. 대체 유인의 삶이란 것이 뭣이답니까?”
“알고 싶으냐?”
스승 다산이 묻자 황상은 두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호, 그래애?”
스승 다산이 두 눈이 휘둥그레 떠지면서 입가에 물수제비 같은 미소가 번졌다.
“「주역」이괘(履卦) 구이(九二)의 효사(爻辭)에 나오는 유인을 말하자면 길을 밟음에 있어 탄탄하니 유인이라야 곧고도 길하다, 즉 효사리도탄탄 유인정길(爻辭履道坦坦幽人貞吉)이니라.”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이구만이라. 실은 지도 그러코롬 살고 싶구만이라.”
“정말이드냐?”
스승 다산이 되물었다.
“그렇구만이라. 선생님 말씀을 들을께로 중국 송대(宋代)의 도연명(陶淵明)이 생각나구만이라.”
27세에 벼슬길에 들어섰지만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고 41세에 누이의 죽음을 핑계 삼아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했던 도연명이었다. 그래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으며 ‘어찌 쌀 다섯 말에 허세부리는 미관말직 소인배들에게 허리를 굽히며 살 수 있으리’하고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전원적인 생활을 즐겼던 것이다.
“내가 유인의 삶이 정녕코 무엇인지 알으켜 주마.”
“스승님. 도연명도 귀거래사를 지었지만요, 이백(李白)도 산중문답(山中問答)이란 시를 지었지라.
묻노니, 그대는 왜 산에 사는가 門余何事棲碧山
웃음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笑而不答心自閑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나가니 桃花流水杳然去
별천지일세, 인간세상 아니네 別有天地非人間”
황상이 이백의 산중문답을 빠르게 외워보이자 다산이 눈을 감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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