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나를 찾아서
정선례 (칠량면, 강진여성산문동아리회원)
거울 앞에 선 낯선 얼굴과 마주한다. 여인의 얼굴에 삶의 질곡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언제 저토록 깊게 팬 주름이 자리 잡기 시작했을까. 빠개놓은 나무 속살 무늬 결처럼 어지럽다. 꽉 짜인 일상에서 내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속절없이 흘러간 날들이었다. 온전히 잃어버린 세월이라 생각하니 거울 속 여인에게 조금은 미안해진다. 민낯의 여인과 만나는 공허함에 울컥함이 차올라 손바닥으로 거울을 닦았다.
녹음이 번지는 싱그런 여름날이면 수국이 예쁘게 수국거리는 고성사 언덕을 올랐다. 그 길을 강진에 살면서 얼마나 많이 올랐던가. 고성사 언덕길을 오른 것처럼 나의 삶 언덕길을 그렇게 오르내린 것이고 그게 주름일지도 모른다. 포장되지 않은 흙 길을 걷는 다는 것은 때로는 넘어지고 돌부리에 치이기도 했다. 그렇게 늘어난 것이 내 얼굴의 주름이었을 것이다. 그 얼굴이 거울 속에서 나를 애잔하게 보고 있다.
내 안에 두 개의 거울을 들자면, 쌀 한 톨도 버리지 못하는 검소함과 명품 가방 앞에 발걸음을 멈추는 허영일 것이다. 만족과 불만족,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두 개의 거울이 마음속에서 대립하곤 했다. 한 치의 양보 없는 두 개의 거울이다. 오만과 편견 속에 갇힌 자아는 때론 상처 받은 내 영혼에 잠 못 들며 뒤척인 날들이 있었고 거울 속에 비친 아찔한 나를 본 순간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여고 친구 영순이가 내 얼굴에 투영되어 파동 친 그 이후다.
영순이는 중학교 친구다. 영순이와 나는 사춘기 학창 시절을 내내 함께 했다. 매점, 영화관, 분식점, 만화방 심지어 수업 후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가는 것까지 함께 다녔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여성 그룹의 ‘놀란스’가 부른 섹시뮤직을 틀어 놓고 영순이를 비롯한 여러 친구와 흠뻑 취하며 놀았던 때이다. 그런데 담임선생님께 들켜버렸다. 음악 소리를 구경하던 누군가 일렀는지 선생님이 알았고, 우리 모두는 복도에서 의자를 들고 벌을 서야 했다.
그때 공부보다는 놀기에 열중했지만 우리의 성적은 상위권에 있었다. 2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목포에서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어, 영순이와 헤어졌다. 하지만 영순이가 내 마음속에서 아주 잊힌 것은 아니었다. 카페 같은데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함께 음악을 듣곤 했던 학창시절 영순이가 그립 곤 했었다. 그런데 그 영순이를 대학병원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우연이었지만 우리는 한 눈에 서로를 알아봤다.
“영순이지?”
“맞는데, 누구? 야 너 선례지?”
우린 그날 모든 일정을 미루고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점심을 함께 했다. 듣고 보니 영순이도 나를 만나고 싶어 이리저리 수소문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둘이 지난날들을 더듬으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영순이와 나의 생활 방식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 옛날 내가 알고 있던 영순이가 전혀 아니었다. 일찍 결혼하여 손자까지 둔 나에 비해 그녀의 아이들은 아직도 학생이었다. 내가 농촌에서 농사일에 까맣게 그을려 평일과 휴일의 분간 없는 나날을 보낸 것과는 달리 그녀는 공직의 꽤 높은 자리에 올라 있었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와 미소 띤 얼굴로 말했지만, 대화 중 점점 범접할 수 없는 묘한 압도를 느꼈다. 그녀는 조직 속에서 단련된 자기관리 모습과 빈틈없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영순은 고등학교 진학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전념했었고,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반 강제로 공무원 시험을 치르게 했다고 했다. 그 시절엔 공무원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때여서 고시학원을 다니지 않고서도 한 번에 붙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제 정년을 앞두고 있는 영순은 남편도 고위공무원이어서 둘의 급여를 합치면 상당히 많았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반가웠던 순간에서 자꾸만 먼 나라에 있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무거움이 다가왔다. 농촌에서 전혀 꾸밀 일 없이 사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흘러내린 윤기 나는 머릿결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을 수 있는 몸매가 부럽기도 했다.
평소 기초화장도 하지 않는 내가 거울을 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녀를 만난 뒤였던 것 같다. 그리웠던 친구를 만나 반가웠지만, 이미 친구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는 거리감에 친구가 아닌 것 같았다. 악착같이 살아온 내 지난한 삶이 내 얼굴에 주름이 되었다는 것이 새삼 보인 것이다.
‘시술을 받아볼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있었다. 중년의 나이는 마음과 행동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가. 내면의 아름다움이 돋보일 오십 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흔들렸다. 삼십여 년 결혼생활 동안 무언가 잔뜩 채우기에만 급급하며 살아왔음을 느꼈다. 사십 대 치열했던 날들이 쌓여 지금 오늘의 내가 되었다. 그렇다면 오십 대의 날들이 쌓여 육십 대의 모습이 될 것이다.
밝음과 어둠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 내면의 거울과 외면의 거울 이 두 개의 거울 앞에서 어떤 거울을 더 닦아야 할까는 오롯이 내 몫이다. 육십 대에 또 오늘과 같은 불안과 회의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나를 잘 경영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후회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얼굴이 아름다운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기쁘게 하고, 마음이 아름다운 여인은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준다.’
언젠가 읽었던 세익스피어의 글을 노트에 끄적거려 보았다. 외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중요하지만 내 외적인 모습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 씀씀이나 말씨, 눈빛은 성찰과 변화된 행동을 통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이 기쁘고 아름답지는 않을지라도 지나온 삶 모두가 내 것의 일부였다는 점을 소중히 기억해야겠다. 중년 여인의 마음자락이 흔들린다. 젊음과는 다른 원숙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거울 속 나를 찾아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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