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정확한 사건 조사가 필수이다
조선 후기에는 산송(山訟)이 빈번했다. 산송이란 묏자리를 다루는 일로, 조상 묘를 잘 써야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는 생각에 이런 싸움이 잦았다. 1785년 경기도 고양에서 묏자리를 두고 이경구와 이기종 집안이 다투게 되었다. 그 와중에 이경구는 이기종 가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구타를 당했고, 이를 피해 도주하다가 밤중이라 산길을 분간하기 어려워 그만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경구의 사망 원인이 누군가에게 맞아서 죽은 것이 아닌데다, 또 절벽 아래로 떠밀려 죽는 것이 아니어서 과연 이를 두고 ‘타살’이라고 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홀로 도망치던 도중에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은 걱을 자살이나 사고사라고 부르기도 어려웠다.
사고사냐 타살이냐
초검(1차 조사)과 복검(2차 조사)응 시행한 사또들은 하나같이 이기종을 주범으로 인정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복검을 한 사또는 사망한 이경구의 등과 귀 아랫부분에 다친 자국이 많지만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 아니라고 보았다. 도리어 이경구의 목이 부드럽게 좌우로 흔들리고 뼈가 없는 듯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떨어지면서 목뼈가 부러져 죽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이경구가 남의 묘지에 몰래 장사지내려 하자 이를 저지하려던 이기종이 사람들을 주동하여 구타한 것이니, 주범은 마땅히 싸움을 선동한 이기종으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외에 싸움에 가담한 이대성, 이진영 등 12명의 이씨 문중 사람들은 구타의 경중에는 차이가 있지만 모두 이기종을 따랐으므로 종범으로 처리했다.
초검 및 복검 보고서를 받아든 경기도 관찰사는 초검과 복검에서 이기종이 이경구를 살해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도 확보하지 않은 채 단지 싸움을 선동했다는 사실만으로 성급하게 이기종을 범인으로 확정했다고 비판했다. 비록 남의 묘지에 몰래 장사를 지내려던 이경구를 앞장서서 두들겨 쫓은 자가 이기종이었지만, 단지 앞장섰다는 이유만으로 주범으로 삼을 수는 없으며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경기도 관찰사는 이경구의 사망 장소를 직접 찾아가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결과 산비탈은 높고 험하며 벼랑바위는 깎아지른 듯 했는데 이러한 지형을 고려하고 당시의 광경을 추론해 보면, 이경구는 몽둥이를 피하려고 몸을 빼 달아나다가 낭떠러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진 것이요, 낭떠러지의 험한 지세로 보아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이경구가 홀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므로, 이기종을 주범으로 결정하기 어려우며 이처럼 사건 판결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다면, 일단 처리를 미루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상급 관청인 형조의 관리들도 경기도 관찰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곧바로 형조에서는 이경구가 발을 헛디뎌 목이 부러졌는데도 단지 이기종이 선동했다는 이유로 그를 주범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는 보고서를 왕에게 올렸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면 가볍게 처벌하라
정조는 보고서를 읽은 뒤 경기도 관찰사와 형조의 견해가 올바르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의 증거가 불분명한 데다 사망 원인 역시 확실하지 않은 한밤중의 변고인데 수많은 사람 중에 이기종 한 사람을 죽여 살인의 책임을 지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설령 이기종이 모의를 주장했더라도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때린 이상, 당연히 구타의 경중을 가지고 범인을 가려야 할 일이었다. 또한 당시 중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이진영의 매질이 가장 모질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진영이 먼저 주창한 이기종과 다를 바가 무엇이라는 말인가?
정조는 이기종이 먼저 주동한 자라 해서 그를 범인으로 확정한다면 그에게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닐까 걱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밤중에 작당하여 살인을 저지른 이기종을 그냥 방면할 수도 없었다. 이에 정조는 사형에서 한 등급 낮추어 이기종을 유배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석방하도록 명했다.
나중에 이 사건의 보고서를 읽게 된 다산은 사건 조사 과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다산은 경기도 관찰사의 주장이 일건 타당한 듯 보이지만, 타살의 흔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만으로 타살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도리어 확실한 추락사의 증거를 찾아내어 타살이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고 보았다. ‘미끄러져 떨어졌다’라고 주장하려면, 시신 확인을 통해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죽은 원인을 확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은 법의학 지침서인 <중수무원록>의 조항을 제시하면서 경기도 관찰사와는 다른 해석을 내렸다.
“자기 스스로 몸을 던진 자는 무게 중심이 아 쪽에 있으므로 다리와 발과 팔 등에 상처가 많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떠밀려 떨어진 경우에는 무게 중심이 위쪽에 있어 얼굴과 손목 등에 상처가 많다.”
이는 스스로 떨어진 자는 자신을 아끼려 하므로 하체 쪽이 먼저 떨어지고, 떠밀린 자는 뜻하지 않은 일이라 상체가 먼저 넘어지기 때문이다.
다산은 “이 사건의 경험서를 보면 다친 부위가 모두 등 뒤와 귀 밑에 있고 목뼈가 부러진 상태로, <중수무원록>의 자살 항목에 언급되어 있는 다리, 발, 어깨에는 모두 상처가 없다. 이를 보면 스스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밀쳐 떨어진 경우가 분명한데 어찌 의심스럽다고 하면서 이기종을 가볍게 처벌하여 드는가?”라고 비판했다.
용서와 관용만이 능사가 아니다
다산은 이경구가 스스로 몸을 던진 것이 아니라 떠밀려 죽은 타살이나 다름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당시 이경구는 등 뒤에서 함성이 크게 일어나자 발아래 비탈이 깎아지른 듯했지만 해를 피하기가 호랑이를 만난듯하여 불이면 불로, 물이면 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캄캄한 밤에 급하게 도망치다가 마침내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이는 핍박당해 떨어진 것이지 스스로 떨어진 게 아니다. 적병이 핍박당해 골짜기로 떨어졌다면 공은 장수에게 있고, 선량한 백성이 골ㅉ기로 떨어졌다면 그 죄는 가장 먼저 소리친 자에게 있음은 명백하다. 이날 남의 묘지에 몰래 장사를 지낸 사람을 두들겨 쫓은 무리는 무려 수십 명인데, 그중에서 깃발과 북을 들고 지휘한 자는 이기종이 아니면 누구인가? 한두 사람이 때렸을 때는 구타의 경중을 헤아려 범인을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무리를 동원하여 전투하는 것 같았으니, 무릇 죽거나 다치게 되면 그 책임이 우두머리에게 있는 법이다. ”의심스러운 죄는 가벼운 형벌로 판결한다’라는 정신에 근거하여 이기종의 죄를 판결하려 한다면 절대 잘못이다. 간혹 임금께서 죽이기를 싫어하고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사형죄를 용서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논의에 있어서는 옳지 않은 것이다.”
다산은 죽음의 원인을 정확하게 밝히는 일만이 공평한 판결의 전제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렇다면 도주하던 이경구는 진정 실수로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은 것인가? 또 상황이 이렇다면 이경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이기종에게 물을 수 없단 말인가“ 다산은 사고사이거나 타살이거나 죽음의 원인을 입증하기 위해 정확한 검안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사건의 경우에는 이경구의 시신 윗부분에 상처가 많은 것을 볼 때 사고사나 자살로 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다산은 조선의 법 집행이 용서와 관용만을 앞세우거나 사건 조사를 정확하게 하지 않는 바람에, 응당 벌을 받아야 할 자를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정의구현에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물론 그렇다고 다산이 엄벌로 능사를 여기거나 자살에 대한 책임을 지우려는데 골몰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진정한 정의로운 정치란, 사건을 먼저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조사한 뒤에 엄한 형벌과 관용을 적절하게 베푸는 데서만 가능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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