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 사모아의 교민 사회에서 김재철은 ‘전설’로 통한다. 이유는 한국 어선으로는 처음 미국 스타키스트에 참치를 납품했고, 2008년에 바로 그 스타키스트를 인수했기 때문이다. 김재철에게 이 모든 성취를 가져다준 첫 무대는 남태평양의 사모아였다.
김재철이 지남호의 실습항해사로서 승선한 해가 1958년이다. 훗날 당시의 상황에 대해 “그 때의 1년간은 내 인생에서 육체적으로는 가장 고생스러웠던 시기였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그 고생이 있었기에 1년 반이 지나서는 젊은 나이에 선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기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가오는 법인데 김재철의 젊은 날이 그랬다. 1967년 그는 광명 1호의 선장 겸 9,10,11호의 선단장으로 활동을 마무리한다. 그의 나이 23세부터 33세까지 9년 남짓한 기간인데 이때 바다와 더불어 활동했던 경험들이 인생관과 세계관의 큰 축을 형성하게 된다.
1)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절대자가 존재한다
바다는 겸손을 가르쳐주었다. 바다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끊임없이 일러준다. 인간의 기준으로 큰 배라고 해봐야 대양에서는 일엽편주에 지나지 않는다. 바다는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건강, 재산과 명성이란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상기시킨다.
“나에게는 꼭 집어 말할 만한 종교는 없습니다만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우주가 있으며 그 우주를 지배하는 어떤 절대적인 힘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출어 기간 바다에서 생활하며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무한함을 실감했고, 또 폭풍우 속에서 산더미 같은 파도와 싸우면서 자연의 무서움을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먼 바다에 나아가 첫 작업을 시작하는 날, 새벽 일찍 목욕제계하고 배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선원들의 안전을 바라는 기도를 하고 나서 조업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절대자의 존재에 대해 그가 평생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왔는지 묻자 이렇게 말한다.
“언제부턴가 내게는 누군가에게 기원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이 역시 남태평양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바다는 너무나 거대해 그저 내가 할 수 일은 안전 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루하루를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하되 그 다음은 대자연을 주재하는 신에게 맡긴다는 습관이 그 이후 몸에 밴 것입니다.”
2) 명확한 생사관을 갖고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
7~10미터가 넘는 파도를 며칠씩 견디다 보면 생사를 넘나드는 숱한 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배가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파도의 골짜기로 곤두박질치는 상황에 이르면 순간적으로 ‘아, 내가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 며칠씩 항해해야 겨우 육지에 닿을 정도로 먼 원양에서 맞닥뜨리는 폭풍우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막막함 그 자체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삶은 단순하게 정리된다. 언제든 사람은 죽을 수 있다는 엄숙한 심적 상태를 경험한다. 인생을 구차하게 살다 가서는 안 된다는 삶의 절대기준은 바다가 김재철에게 준 선물이다. 그에게 명확한 생사관을 갖게 해준 것 또한 바다였다. 딱 한 번 살다 가는데 치사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삶의 원칙이 되었다.
또한 바다는 그가 요행에 기대거나 타인의 힘에 기대어서 사업을 확장시키는 안이한 편볍을 멀리하도록 만들었다. 분수를 망각하고 과속, 과신, 과욕으로 기업을 넘어뜨리고 납세자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는 단 한 번이라도 그런 것들에 의지해서 사업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선장 경험에서 깨달은 무형의 선물이었다. 자신의 실력과 처지, 상황을 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김재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 대양을 항해하는 배의 선장이 가장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지금 내 배가 어디에 있는가? 즉 배의 위치를 아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목적지를 향해 정확한 코스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선박이 표류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그 배의 선장이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어야 할 세 가지 철칙이 있다. 현재 좌표가 무엇인지, 그 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의 좌표가 어디이며, 항로를 제대로 잡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일이다. 이 세 가지를 분명히 인식해야만 배는 목표지점에 온전히 도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재철은 바로 이러한 정신으로 기업을 이끌어왔다.
3) 살아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바다에서는 이따금 사람이 죽는 사고가 발생하곤 한다. 김재철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해 선원들의 죽음을 직접 수습해야 하는 상황을 직면하곤 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거나 혹은 망자를 떠나보내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기도 했다. 다른 한편 살아서 숨 쉬고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활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절실히 깨우치게 되었다. 김재철이 평생을 부지런히 일해온 까닭은 언젠가 죽음을 맞게 될 것이고 그 이후에는 영원히 쉴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선원들을 눈앞에서 잃는 것은 죽음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체험하게 한다. 엊그제까지 더 잘 살기 위해 함께 노력 했던 선원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그에게 치열하게 추구해야 하지만 불시에 마감할 수 있는 것이 인생임을 엄정히 가르쳐주었다. 그러므로 촌음을 아껴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자 책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기업에서 어떤 사람을 보면 승진한 뒤에는 일하지 않고 아랫사람만 시킵니다. 그렇다고 꾸준히 자기계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좀 편하게 지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때부터 발전이 멈추는 겁니다. 저는 몇가지 사업에서 외국 기술자들을 초빙해 지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왜 한국 사람들은 직급이 높아지면 일을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반장이 되고 과장이 되고 승진만 하면 뒷짐 지고 말로만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일은 안 하고 돌아다니니 경쟁력이 없지요.”
4) 세상에 자랑할 것은 별로 없다
바다는 광대하다. 끝없이 펼쳐진 대양은 높고 낮음이 없다. 바다가 가르쳐주는 것은 ‘평등’이다. 어떤 사람은 좀 더 성취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좀 더 많이 배우며, 또 어떤 사람은 더 나은 집안에서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더 가졌다고 해서 잘난 체하면 안 될 일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라 해도 언제든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그의 인생에서 돈, 인간관계, 여자 문제, 공사 구분 등과 관련해서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던 것도 바다가 가르쳐준 삶의 기준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바닷물은 항상 스스로를 낮추고 낮은 자리로 흘러 빈자리를 메우면서 수평을 이뤄낸다. 바다는 사람을 차별하는 법이 없다. 크고 높은 배일수록 더 세찬 바람을 받으므로 보다 강한 복원력을 필요로 한다. 일의 진정한 가치, 땀의 신성한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출세해서 편히 살려고만 하는 구습이 아직도 팽배하다. 자리가 높을수록 더 많은 역할과 책임을 맡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 부족한 우리 사회에 바다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클 것 같다”
처음 시작하던 때의 마음가짐을 잊지 말자고 김재철은 평생 노력하고 다짐했다. 이렇듯 바다는 그의 내면세계를 인도하는 큰 지침으로 ‘겸손’을 주었다. 그의 겸손은 제임스 조이스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추락하지 않기는 너무 어려워, 너무 어려워” 삶이든 사업이든 자칫 잘못하면 여태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그는 바다에서 경험적으로 배웠다.
5) 삶 그 자체는 전쟁과 다를 바 없다
바다에서 선장은 매일 피 말리는 전쟁에 뛰어든 전사 같은 존재이다. 날마다 기록을 만들어야 한다. “저는 열심히 했습니다”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어획고는 말이 아니라 몇 마리 혹은 몇 톤이란 정확한 숫자로 기록된다. 선장들은 참치잡이에서 승리하기 위해 저마다 목숨을 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자식들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자주 해주었던 말씀이 무엇이었는가?”라고 묻자 모두 한 목소리로 “사업은 언제든지 망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것은 자식들에게 교훈으로 삼도록 한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한 자극이자 경계였을 것이다.
6) 움직이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성과는 부지런히 활동하지 않으면 거둘 수 없다. 최고의 어획고를 기록하는 일도 마찬가지이지만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는 일도 최선을 다해 움직여야만 가능하다. 그냥 기다린다고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자에게만 생존과 성장의 월계관이 주어진다. 기업의 생존법칙은 곧 자신의 인생 생존법칙과 같다고 생각한다.
7) 세상에 작고 사소한 일은 없다
대양에 떠 있는 배는 100톤이든 200톤이든 원리는 같다. 철판으로 만든 구조물이 바로 선박이다. 철판에 약간이라도 균열이 생기면 배는 위기에 처한다. 작은 구멍이든 큰 구멍이든 크기는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철판에 구멍이 났다는 사실 자체이다. 작은 실수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이 바다이다. 김재철이 훗날 기업 경영에서 직원들에게 사소한 것에 대해 엄격함을 유지하고 심하게 질책하는 데는 젊은 날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가 기업을 이끌면서 “사소한 것도 소중하게”를 행동강령으로 정한 까닭도 그것이 가져오는 치명적인 타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8)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솔선수범과 희생에서 나온다
김재철이 선장으로 승선해 남태평양 조업에 나섰던 지남 2호는 80톤 급이고 길이는 35미터 정도였다. 선장을 비롯한 18명의 선원들은 몇 달을 좁은 선상에서 일하며 기대하는 어획고를 올려야 한다. 선원들은 선장이 무엇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속속들이 알 수 있을 만큼 좁은 공간에서 장시간 함께 지낸다. 아버지뻘 되는 선원들과 일하는 젊은 선장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잘 움직이게 할 수 있는지 차근차근 배웠을 것이다. 김재철은 책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리더십을 배웠다.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체험했다. 좁은 선상에서 선원들을 이끌면서 체득한 솔선수범과 희생의 정신은 김재철이 평생 동안 실천했던 덕목들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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