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열전(4)
형가(2)
형가가 태자에게 말했다.
“태자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신이 찾아뵙고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신이 지금 진나라에 가더라도 진나라가 신을 믿어 줄 만한 증거가 없다면 진나라 왕에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번 장군은 진나라 왕이 금 천 근과 식읍 만 호를 내걸고 잡으려고 하는 자입니다. 번 장군의 머리와 연나라의 옥토인 독항의 지도를 진나라 왕에게 바친다면 그는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며 저를 만날 것입니다.”
“번 장군은 심히 곤궁한 나머지 내게 몸을 의탁하러 왔소, 내 사사로운 사정으로 번 장군을 헤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른 계책을 생각해 보시오.”
형가는 태자가 차마 번 장군을 죽이지 못할 것을 알자 직접 번어기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는 장군을 혹독하게 대했다고 들었소, 그들은 장군의 부모와 친척을 모조리 죽이고 지금은 금 천 근과 식읍 만 호를 내걸고 장군의 목을 노리고 있는데 장차 어찌하시렵니까?”
번어기는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이 골수에 사무쳐 아무리 생각해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형가가 말했다.
“지금 연나라의 근심을 덜고 장군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계책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번어기가 앞으로 다가앉으며 물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형가가 말했다.
“장군의 머리를 얻어 진나라 왕에게 바친다면 진나라 왕은 틀림없이 기뻐하며 나를 만나고자 할 것입니다. 그때 나는 왼손으로 그의 옷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그의 가슴을 찌를 것입니다. 그러면 장군의 원수도 갚고 연나라가 입은 수치도 씻을 수 있게 됩니다. 장군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번어기는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한 손으로 팔을 부여잡은 채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는 내가 밤낮으로 이를 갈고 속을 태우며 상심하던 일인데 오늘 당신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자는 달려와 시신에 엎드려 애통하게 울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형가는 번어기의 목을 함에 넣고 봉했다.
그후 태자는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비수를 구하고자 했다. 그는 조나라 서부인의 비수를 100금을 주고 사들였다. 장인을 시켜 칼날에 독약을 묻혀 사람을 찔러 보았는데 한 방울의 피를 흘릴 정도인데도 즉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태자는 행장을 꾸려 형가를 떠나보내기로 했다.
그때 연나라에는 진무양이란 용사가 있었다. 그는 열세 살에 사람을 죽인 일이 있을 정도로 험상궂게 생겨 누구도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태자는 진무양을 형가의 부관으로 삼았다.
한편 형가는 자신과 함께 갈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먼 곳에 살고 있는 자라 시간이 되어도 당도하지 않았다. 형가는 그를 계속 기다렸고 그 사이에 행장은 다 꾸려졌다. 형가의 출발이 늦어지자 태자는 조바심을 냈다. 그는 형가의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여 찾아가 물었다.
“시일이 촉박한데 형경은 무슨 생각으로 출발을 하지 않소? 진무양이라도 먼저 보낼까 하오만.”
형가는 화를 내며 태자를 꾸짖었다.
“태자께서는 어찌 진무양을 보내려고 하십니까?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길입니다. 비수 한 자루를 들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진나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제가 시일을 늦추는 것은 함께 갈 사람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태자께서 늦다고 하신다면 이대로 떠나겠습니다.”
마침내 형가는 출발했다. 태자와 이 일의 내막을 아는 몇몇 빈객만이 흰 상복을 입고 그를 전송했다. 역수에 이르러 제사를 지내고 작별할 때가 되자 고절 리가 축을 타고 형가가 그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처량하고 슬픈 그 소리에 전송 나온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형가가 앞으로 나서며 이렇게 노래했다.
바람은 소슬하고
역수는 차구나
장사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형가가 다시 높고 격정적인 소리로 노래하자 전송 나온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을 부릅뜨고 머리카락이 관을 찌를 듯 노기를 띠었다. 형가는 소레에 올라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진나라에 이르자 형가는 진나라 왕이 남달리 아끼는 중서자 몽가에게 천금의 예물을 바쳤다. 몽가는 형가를 위해 먼저 진나라 왕에게 아뢰었다.
“진나라 왕은 대왕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진나라에 맞서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나라를 들어 대왕의 신하가 되고자 합니다. 그런 후 제후의 반열에 들어 군현과 같이 공물을 바치고 선왕의 종묘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감히 직접 와서 말하지 못하고 삼가 번어기의 머리와 독항의 지도를 함 속에 넣어 보냈습니다. 이를 위해 연나라 왕은 궁정에서 예를 갖추고 절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사신이 대왕께 말씀드리고자 하니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진나라 왕은 크게 기뻐하며 조복을 입고 구빈의 예를 갖춘 후 연나라 사신을 함양궁에서 접견했다. 형가는 번어기의 머리가 든 함을 받들고 차례로 계단 앞에 이르렀다. 그러자 진무양의 얼굴색이 변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진나라의 신하들이 이상하게 여기자 형가가 진무양을 돌아보고 웃은 후 앞으로 나아가 사과했다.
“북쪽 오랑캐 출신의 비천한 놈이라 천자를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대옹께서 영서해 주신다면 사신의 예를 다하도록 해주시옵소서.”
진나라 왕이 형가에게 말했다.
“진무양이 들고 있는 지도를 가져오라.”
형가가 그 지도를 꺼내 진나라 왕에게 바쳤다. 진나라 왕이 지도를 펼치는 순간, 비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가가 왼손으로 진나라 왕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비수를 잡아 진나라 왕을 찔렀다. 그러나 비수가 몸에 닿기도 전에 진나라 왕이 깜짝 놀라 일어서는 바람에 옷소매가 찢어졌다. 왕은 자신이 차고 있는 칼을 뽑으려고 했으나 황급한데다가 칼집에 단단히 꽂혀 있어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형가가 이틈을 노리고 왕을 쫓아가자 왕은 기둥을 따라 돌면서 달아났다. 그러나 신하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어찌할 줄을 모르면서도 진나라 법 때문에 무기를 든 호위병들조차 전상(殿上)에 오를 수 없었다. 진나라 왕도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호위병을 부를 경황도 없었다. 형가가 진나라 왕을 쫓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때 진나라 왕의 주치의인 하무저가 들고 있던 약주머니를 형가를 향해 던졌다. 그리고 진나라 왕이 기둥을 돌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이렇게 소리쳤다.
“폐하! 칼을 등에 지고 뽑으십시오.”
왕은 칼을 등에 지고서야 비로소 겨우 뽑아 형가의 왼쪽 다리를 잘랐다. 형가는 쓰러진 채 진나라 왕을 향해 비수를 날렸으나 구리 기둥을 맞혔다. 진나라 왕은 다시 형가를 내리쳤다. 형가는 여덟 곳에 상처를 입었다. 일이 실패했음을 깨달은 형가가 기둥에 기대어 웃으며 이렇게 꾸짖었다.
“일이 실패한 것은 왕을 사로잡고 협박하여 땅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태자에게 보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달려 나와 형가를 죽였다. 진나라 왕은 오랫동안 불쾌해 했다. 얼마 후 공에 따라 상을 주고 죄를 진 자에게는 벌을 주었다. 왕은 하무저에게 황금 200알을 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무저는 나를 위해 약주머니를 형가에게 내던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격노한 진나라 왕은 더 많은 병력을 조나라에 있는 왕전에게 보내 연나라를 치게 했다. 10개월 만에 연나라 도읍인 계성이 함락되자 연나라 왕 희와 태자 단은 병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동을 지켰다. 진나라 장수인 이신이 연나라 왕을 바짝 추격하자 조나라의 마지막 왕인 가(嘉)가 연나라 왕 희에게 편지를 보냈다.
진나라가 연나라 왕을 추격하는 것은 태자 단 때문입니다. 지금 왕께서 단을 죽여 진나라 왕에게 바친다면 진나라 왕의 노여움은 반드시 풀릴 것입니다. 또한 연나라의 사직도 보존될 것입니다.
그후 이신이 단을 추격하자 단은 연수 부근에 몸을 숨겼다. 연나라 왕은 사람을 보내 태자 단을 죽여 진나라에게 바치려 했으나 진나라는 계속해서 연나라를 공격했다. 5년 후 진나라는 마침내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연나라 왕 희도 사로잡았다.
그 이듬해 진나라 왕은 천하를 병합하고 스스로 황제라 불렀다. 진나라가 태자 단과 형가의 빈객들을 잡으려고 하자 모두 달아났다. 고점리라는 이름을 바꾸고 송자라는 마을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지쳐 괴로워했다. 그 무렵 주인집 마루에서 손님이 축을 타는 소리를 들으면 고점리는 떠나기 아쉬워 주위를 맴돌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잘 탈 때가 있지만 못 탈 때도 있구나.”
하인이 주인에게 고했다.
“저 머슴은 음악을 좀 아는지 잘 타고 못 타고를 평가합니다.”
이에 집주인이 고점리를 불러 축을 타게 했는데, 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모두 칭찬하며 그에게 술을 권했다. 고점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곤궁하게 지내봐야 끝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에 마음을 고쳐 먹고 보따리 속에서 축과 좋은 옷을 꺼내 모습을 고치고 다시 나타났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자리에서 내려와 예를 갖추어 그를 상객으로 모셨다. 고점리가 축을 타며 노래를 부르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후 송자의 사람들은 서로 고점리를 손님으로 모셨다. 이 소문이 시황제의 귀에 들어가자 시황제는 그를 불러들였다, 어떤 사람이 그를 알아보았다.
“이 사람은 형가의 친구 고점리입니다.”
그러나 시황제는 그의 축 타는 솜씨를 아까워하여 목숨은 살려 주는 대신 눈을 멀게 했다. 그후 시황제는 고점리가 축을 타면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점점 그를 가까이하기에 이르렀다. 고점리는 납덩이를 축 안에 넣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시황제 곁에 가까이 가게 된 고점리는 축을 들어 시황제를 내리쳤지만 맞지 않았다. 시황제는 고점리를 죽이고 그후 죽을 때까지 제후국 출신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노구천은 형가가 시황제를 찌르려 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아, 그가 칼로 찌르는 법을 배우지 않은 것이 애석하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 예전에 내가 그를 꾸짖었으니 그는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테지.”
태사공은 말한다.
세상에 전해지는 형가의 이야기 중에 태자 단을 일러 “하늘에서 곡식이 내리고 말 머리에서 뿔이 났다”고 했는데, 이는 지나친 말이다. 또한 형가가 진나라 왕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하나 사실이 아니다. 본래 공손계공과 동중서는 허무저와 사귀어 그 내막을 잘 알고 있는데, 내게 상세히 말해 주었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조말부터 형가에 이르기까지 다섯 자객들 중에는 의거에 성공한 자도 있고 실패한 자도 있다. 그러나 모두 뜻을 굳게 세워 그것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어찌 까닭 없는 일이겠는가. <다음 호에 계속>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