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편지
무관(懋官)선생님, 언제부터인가 선생님께 삼가 편지를 올리고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득한 시차(時差)의 간격에 계신 분이나 책 속에서 만나 오래 기리게 된 인연이니 친정오라비에게 미주알고주알 제 일상을 토로하는 누이가 된들 어떨까 싶어지기도 하고.
제가 생각해도 참으로 기이한 나날들이었습니다. 이리 당하고 살 수 없다, 뜻밖의 송사(訟事)를 벌이기도 하고. 도대체 풀 수 없는 암호에 사로잡힌 듯 설움이라는 쌀을 일궈 밥을 앉히는 가슴 먹먹함에 빠지기도 하고. 꽤 정성들인 조리질에도 여전히 씹히는 쓸쓸함이라는 뉘를 군말 말고 꿀떡 삼켜야 된다는 이 부분만을 가까스로 해독, 어두운 미궁 속 놓인 기계의 나사처럼 고분고분 견디자는 중이라고 할까요.
한 달 가까이 매달려 방을 새로 들였습니다. 애초 방이 목적이 아니라 부질없이 솥만 데우던 불이 아까워 아궁이를 집안으로 들였습니다. 시시비비의 끄트머리엔 결국 돈, 갈수록 저를 지배하려드는 돈 따위에 의지하지 않는 생을 꾸리고 싶다는 념에, 그러니까 석유라던가 전기 따위의 문명의 이기에 의존하지 않는 자연친화적인 삶. 할 수만 있다면 과감히 전기코드를 뽑고 철저히 제 동력에 의지해 꾸리는 생활을 해보고도 싶었습니다. 두레박 걸린 융숭 깊은 샘까지야 어찌 바라겠습니까만 마중물 한 바가지로 제 옹골찬 속 시원히 쏟아 내주는 펌프샘이 그렇고, 가물거리며 겸허하게 어둠과 타협하는 작은 호롱불,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가 있는 방 하나가 간절했습니다. 정전이라도 되어버리면 칠흑의 어둠, 물도 불도 모두 올스톱 속수무책에 빠지는 답답함이 제일 컸겠지요.
인자한 인상을 가지신 할아버지께서 구들을 놓아주시고 남편까지 세 사람의 인부가 동원하여 완성한 방, 저야 곁에서 뒷수발로 거들기만 했을 뿐인데 빠지기 직전인 발톱도 그렇고 몸 곳곳 찢기고 베고 멍들고. 마치 자학하듯 내 육신에 흠집 내는 것만이 상처를 잊을 수 있는 방법이기라도 한 듯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걸 방치했습니다. 낮에는 침묵하던 것들이 밤이면 비로소 깨어나 수런수런 참았던 제 목소리를 내듯 가장 예민한 부위인 손가락 마디마디, 어깨 뼈끝 같은 곳이 밤이면 슴벅슴벅 아리고, 밤새 저를 괴롭히며 재우지 않는 것은 몸의 상처가 아니지만요. 그때마다 참으로 반성할 것이 많은 사람이 저라는 자각에 잘못한 아이가 군소리 없이 회초리 맞듯 고통을 달갑게 견딥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집을 짓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보이자고 짓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오래된 사진 속 남편의 고향집, 우물가에서 아직 처녀인 시누이가 웃고 있고 여덟 살 아래 터울의 까까머리 소년인 남편은 무엇에 골이 났는지 잔뜩 상을 찡그리고 있는 사진 속 정겨운 풍경도 재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나무가 있고 흙이 있고 장독대가 있고 흙담 밑을 따라 채송화, 맨드라미, 봉숭아, 접시꽃, 백일홍 같은 토종꽃들이 벙그라지고 앞마당엔 강아지들이 뒷마당엔 새끼 거느린 어미 고양이가 골골골 즐거운 뱃소리를 내는 집, 그곳에서 잡곡 넣은 밥에 간이 든 젓갈 한 종지, 김치 어울려 차려진 조촐한 밥상을 차려내고.
그게 그립다 들릴 방문객들을 위해서 우습게도 옛 상여꾼들이 입던 바느질 투박한 무명옷도 챙겨두었습니다. 도회에서의 편리함을 버리고 꾸역꾸역 벽지의 시골로 향하던 딸, 그를 꾸중하시던 우리 어머니께선 이 무슨 궁상에 청승이냐 또 나무라시겠지만 푸른 쑥물을 들여 가볍게 풀 먹여 윗목에 놓아둘 예정입니다. 군불 땐 황토방에서 입고 온 장식 요란한 옷만 벗어버릴 게 아니라 그들의 근심까지도 훌훌 벗어버리기를 바랍니다. 맹위 떨치는 더위가 절정인 지금은 좀 그렇겠지만 한기 뼈끝에 시리게 와 닿는 날, 뜨끈뜨끈한 아랫목에서 잘 자고 일어나 창을 열고 들판의 고요를 하늘로 밀어 올리는 풍경의 새벽을 맞이하는 것도 꽤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마당 한 가운데 두겠다던 펌프샘은 요원하지만 그 중 한 가지 소망은 푼 셈인가요. 아궁이 불을 길들이기 위해 요 며칠째 불 앞에 꼼짝없이 잡혀 지냅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 30도를 웃도는 삼복더위에 활활 타는 장작불과 며칠째 씨름 중입니다. 집에 굴뚝이 있다는 건 나무에 불이 들어가 회빛 안개로 변하는 몽환적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더니 꽃상여 탄 사자(死者)가 제 머물던 옛집에서 마지막 아쉬운 걸음하 듯 티 없이 타는 연무(煙霧)의 매캐한 냄새가 바닥을 살살 훑듯이 기어가는 상상 때문인가요.
“스님, 불 들어갑니다.”
자신의 마지막 흔적인 몸까지 지우는, 어느 큰 스님의 다비식 중계 때 들었던 이런 말을 농처럼 뱉으며 저는 한 개비의 장작을 던져 넣기도 합니다. 온 몸 뚝뚝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다가 우연히 한지 창에 어른거리는 나리꽃 무더기와 눈이 마주치면 아! 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과 함께 대상 없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합니다. 아니게 아니라 이글이글거리는 장작불 덕분에 자갈자갈 끓는 무쇠솥의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겸손해집니다. 세상 모두에게 지극한 공대를 바치고픈 마음까지 드는 것입니다. 누군가 제게 했던 시린 말들도, 부디 부디 제가 누군가에게 준 냉기어린 말들도 따뜻하게 데워지기를 바라는 제 속 기원 때문인가요. 언니며, 동생, 남편에게 온 마음 바쳐 주인을 섬기는 하녀처럼 목욕물을 대령해바칩니다.
군불을 때며 돌아보니 제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꾸물대는 닭들
불을 때고 등을 지지고
배를 지지고 길게 혼잣말하며
어둠을 지졌다
말벌들 잉잉대던 유리창에 낮은 자고
대신 뭇별들이 잉잉대는데
횃대에서 푸드덕이다 떨어지는 닭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시의 몇 구절 이렇듯 두서없이 읊조리기도 하고 불 앞에 앉아 너울거리는 불꽃 인 듯 하염없이 피어오르는 숱한 상념들, 도룡기(屠龍技)라는 말도 잠깐 서성거리다 갔습니다. 용을 죽이는 기술을 위해 천금 넘는 재산을 탕진한 사나이가 정작 재주를 써먹을 기회가 없었다나요. 본디 싸움은 제 몫 이 아니었던 것을 승산 없는 싸움에 기진맥진한 제 꼴이 영락없이 그렇습니다. 탕진한 시간, 제 눈물 말려 소금 얻자였지요. 버리고 포기해야할 것이 몇 푼 물질들 뿐이겠습니까. 사람에게 입은 한기(寒氣)를 다스리려 벌겋게 달아오른 아궁이 앞에서 제 쓸데없는 생각들마저 태우는 뜨거운 여름날입니다.
*무관(懋官)-조선 정조 연간의 학자이자 시인, 산문가인 이 덕무(1741-1793)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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