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화가의 봄
화가 김일화
1968년 강진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개인전 14회 다수의 단체전 참가
올해도 봄은 여지없이 왔다. 눈이 시리도록 추웠던 겨울의 두툼한 장막을 뚫고 어느 틈에 봄기운이 찾아든 것이다. 봄은 여인의 계절 때문일까. 봄이 되면 무겁던 몸이 가벼워지면서 어디론가 쏘다니고 싶어진다. 겨우내 화실에서 겨울잠 자는 동물처럼 지내다가 이렇듯 봄이 오면 문득 바깥세상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며칠 전에 참으로 오랜만에 나들이를 하였다. 봄기운이 나를 불러낸 것이다. 오전에 짧게 작업을 마치고 밖으로 나간 것인데, 길거리는 여느 때보다도 활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식물원과 화원에 들려 주머니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들고 셔터를 눌러댔다. 특히 꽃과 식물들이 주소재이기 때문에 봄이면 그 자료를 모아두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꽃그림을 그리지만 막상 꽃을 보면 즐겁고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정녕 꽃은 내게 위안을 주고 그리움을 주고 희망을 주곤 한다. 그래서 지금껏 꽃과 함께 살아온 삶이었다. 꽃을 찾아 그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고 내 머릿속에 그 자태를 담았으며 내 화폭에 그 꽃을 그려낸 세월이었다. 어느 가수는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이 있다고 노래를 하였지만, 정녕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이 땅에 있을까 싶다.
만물이 약동하는 봄은 어지럼을 느끼게 한다. 독한 꽃향기에 신경이 마비된 느낌이다. 지구가 흔들리는 기분까지 든다. 그런데 나는 꽃에서도 봄을 느끼지만 거리의 여인에게서도 봄을 느낀다. 식물원과 화원을 구경한 후 홍익대 앞을 걸어갔을 때 2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 한 점 칸나처럼 걸어가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행여 춥지 않을까 싶을 만큼 얇은 옷차림이다. 더구나 짧은 치마라니!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싱싱하다 못해 물살을 치고 나가는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은 역동을 느끼게 한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귀엽고 산뜻하고 건강한 모습이어서 자꾸 시선이 갔다. 여인은 생명의 순환을 잘 아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 오면 그림에 들어가는 색감들도 변화가 온다. 진한 분홍과 노란색, 연두와 보라색 등을 섞어 총천연색의 절묘한 배합으로 잘 차린 식탁을 준비하듯 그렇게 봄맞이를 하고 싶고, 내 화폭에도 담아내고 싶다. 실내는 아직 추운기운이 남아 있는데도 내 화폭에는 벌써 봄의 절정이 그려진다. 만화방창 봄을 그리는 내 손 끝을 보며 천상 나는 화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봄 또한 나는 화실에서 죽치며 지낼 것 같다. 마음은 섬진강 매화밭이나 아버지의 고향 강진 백련사 동백꽃밭으로 달려가지만 화실은 나를 꽁꽁 묶어두기 때문이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그림들이 여지없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미국 L.A 전시회를 앞두고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려야 하는 나는 이 봄도 속절없이 보내야만 할 것 같다. 밖의 봄은 나를 부르지만 화폭의 봄은 나를 잡아당기는 꼴이다. 하지만 어쩌랴. 봄을 밖에서만 맞이해야만 반드시 봄일까. 화폭의 봄도 봄은 봄이겠지. 어쩌면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봄일지도 모른다.
불혹의 나이까지 와 버린 지금, 그동안 몇 점 안 되는 그림을 완성했지만 초조한 마음은 이 봄 또한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얼마만큼 할 수 있을까, 다시 태어나도 화가에의 길을 걸을 것인가, 그 고뇌도 이 봄 앞에서 여전하기만 하다. 화가에의 길이 후회스럽지는 않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작품, 후세까지 기억되는 작품을 하고 싶은 욕망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니리라.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내게 있어서 그림은 타인과의 소통의 장이요, 삶의 전부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봄에도 나는 여전히 붓질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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