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향월촌 26> 벌교 바람 / 시와 산문 / 박부민 시인
벌교 바람
부용산 같은 데서 쑥국쑥국 동편제 서편제로 토해내는 여자의 붉은 울음, 그 봉두난발이 바람이다
철다리 피노을로 쩌그럭쩌그럭 목욕하는, 뙤약볕에 그을린 꼬막 껍데기의 접힌 물결 이랑이 바람이다
진트재 자드락에 서걱서걱 하얗게 시린 입김만 흩뿌려놓고 달아나는 써늘한 구름의 주검 같은 그늘이 바람이다
컴컴한 터널의 분진을 몰고 와 땅덩어리 좌우로 가르며 황토 언덕배기에 캑캑캑캑 눈발 섞인 기침 뱉어 짓달려오는 징하디징한 저것이 바람이다
예나 시방이나 마른 풀 삭신 오매오매 쑤셔대는 벌교,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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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trauma)란 말이 있다. 외상성신경증(外傷性神經症)이라고도 하는데 사고나 폭력에 의한 신체적 상해나 쇼크를 칭하는 정신의학적 용어이다. 한마디로 과거의 안 좋은 충격이 현재까지 미치는 것을 말한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적, 집단적 트라우마도 있다. 과거의 역사적인 큰 사건의 충격이 치유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여러 방면으로 전이되는 증상이다. 예컨대 일본의 대지진과 원전 방사능 사태는 전 세계적으로도 충격이지만 당사자인 일본 자국민들의 사회적 트라우마는 방사능 플루토늄의 반감기 못지않게 오래 갈 것이다.
특히 전쟁, 대학살, 폭력으로 인한 사회적 트라우마는 사회와 개인의 깊은 한(恨)이 되어 삶 전체를 오래 지배하고 대물림되기도 한다. 이런 사회적 트라우마는 자주 그 사건의 주 무대인 장소와 연관되곤 한다. 6.25의 전국토적 상흔은 물론, 4.3 항쟁의 제주도, 여순사건의 여수와 순천, 5.18의 광주, 용산 참사 등이 그렇다. 조정래 선생의 역작『태백산맥』의 주 무대인 벌교도 우리 현대사의 좌우 이념 대립이 초래한 비극적 트라우마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런 역사의 진정한 교훈을 바르게 깨달아 확대재생산 하지 못한다면 그 트라우마는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유형무형의 고통으로 이어져 갈 것이다.
지금도 잃어버린 10년이니 빨갱이니 하면서 광적이고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그 트라우마의 희생자이며 또 다른 트라우마를 생성하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한다. 남도 땅 여러 곳이 사회적 트라우마를 지닌 역사의 현장임을 인식한다면 만화방창 호시절을 맞아 그런 지역에 나들이를 갈 때라도 한번쯤은 자녀들과 함께 그 교훈들을 되새겨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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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부민 시인 / 1996년 계간 <시와산문> 신인상 당선 (조병화 시인 選) 2005년 한국크리스챤문학상 수상. 시집『등불이 있는 마을』(시와문화 2010) 현 남도햇빛교회 담임목사 nasaret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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