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18
김현임(수필가)
고분지통(鼓盆之痛)
그녀를 기다린다.
폐암투병 중인 남편의 쾌차를 위해 공기 좋은 시골을 물색하던 그녀가 내 집을 찾아온 건 불과 한 달 전, 50평도 좋고 100평도 좋으니 남편이 편안히 거처할 오두막 터를 알아봐 달랬다. 그날도 나는 안절부절 마당을 서성이며 그녀를 기다렸었다. 어떤 얼굴로 그들을 맞아야할 지 적잖이 걱정이 되었다. 암 환자 특유의 초췌한 모습으로 변해 있을 그녀의 남편, 그를 어떻게 태연히 대면하나. 그동안 문득, 문득 부피 큰 근심에 휘몰려 두서없이 새벽전화질만 몇 번, 오랜 문우인 그녀의 남편과도 안면을 나눈 사이였지만 병상의 그를 직접 찾아 나설 용기가 없어 차일피일 망설이다가 그만 2년여가 흘러버렸기 때문이다.
애초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을 달래줄 어떠한 언어도 갖지 못한 사람이 나였다. 일하는 언니가 벌겋게 부풀어 오른 엄지손가락 화농 부위를 바늘로 찔러 달라 내밀었을 때, 열일곱의 나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치며 저 멀리 달아났다. 무섭다와 두렵다의 간극, 이런 느낌은 분명 무섭다는 유어(幼語)쪽에 가깝다. 고통은 절대로 다른 사람과 나누어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던 걸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오만이라 했지만 갈수록 예리해진 공감도가 오히려 나로 하여금 눈 질끈 감고 그 상황을 외면하게 하는 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공포였다. 불행을 당한 이에게 위로의 말은커녕 속수무책, 말문조차 막혀서 그저 멍해져버리는 나.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언어상실증이랄까. 하여 나는 상가에 조문을 가서도 영정 앞에 서지 못한다.
집 지을 기대에 부풀어 돌아간 직후 급격한 혼수상태, 결국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울먹이는 음성으로 전해왔다. 그리고 겨우 일주일 만에 그녀의 손을 영영 놓아버린 남편, 유달리 금슬이 좋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얼마나 상심이 클까, 만나면 첫 말을 무어라 해야 하나, 역시 머리 속은 일시 정지 상태, 어떤 위무의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우연히 눈에 밟히는 초춘(初春)의 민들레만 내 맘처럼 애잔히 흔들릴 뿐.
“이제 삶의 목표가 생겼으니 기분이 한결 좋아져 밤새 치닫던 지독한 통증도 없어진 것 같다.”
했던가. 강이 내려다보이는 남향의 집터가 맘에 든다며 들뜬 어조로 그가 한 말, 그것이 마지막 말이 되다니.
남편을 잃은 아내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은 무엇일까. 그녀를 기다리는 내내 기억 속 낱말들의 갈피를 더듬는다. 불쑥 떠오른 고분지통(叩盆之痛)은 아내를 잃은 남편의 슬픔을 대변하는 말이다. 오류(誤謬)인지 내가 알고 있던 고(鼓), 즉 ‘북, 맥박, 두드리다’라는 뜻의 글자 대신에 ‘잡아당기다. 두드리다, 묻다, 물어보다’는 의미의 고(叩)가 씌이기도 하는 이 사자성어. 아내를 잃는다는 것이 남자들에겐 잘 기르던 화초분을 뒤엎은 정도의, 고작해야 그만큼의 허전함인가싶어 나도 모르게 이마가 찡그려졌었다. 그러다가 고복격양(鼓腹擊壤), 즉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한다는 태평성대(太平聖代)의 반어로 파생된 것이려니 짐작하며, 파도 휘몰아치는 망망대해에서 졸지에 노도 닻도 잃은 신세가 아내 사별 후 사내의 심사라는 책 구절로 애써 다독였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요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도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윤동주의 ‘무서운 時間’ 全文
고통은 살아있음의 유일한 방증이니 병마의 고통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는 불침번(不寢番)이라던 소설가 최인호 씨 말은 옳다. 그렇지만 죽음은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가장 무자비한 폭력이다. 하찮은 고사리도 꺾을 때 꺾는다는데 우리 곁의 사람들을 황급히 불러 우리와 떼어 놓는 이유를 어찌 짐작할까. 너나없이 겪는 일이라는, 약간의 시차는 있겠지만 세상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로 그녀의 부피 큰 슬픔을 덮어줄 수 있을까. 유달리 작은 몸피에 파리한 안색으로 조문객을 맞던 그녀.
남편을 잃은 아내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은 아무리 용을 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에 지아비 사후 그 뒤를 따라 죽음의 길을 택한 열녀들의 고사가 어른거려 고개를 내젓는다. 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위무할 말이 무엇일까. 마른 나무요 불기 사라진 재, 고목사회(枯木死灰)에 적막강산 속의 그녀. 내 차라리 고인에 대한 언급을 삼가리라.
튕기던 거문고를 빼앗겨버린 것을 기리던 이를 보낸 슬픔에 빗댄 고금지비(鼓琴之悲)가 스쳐간다. 오직 제 그림자만 남은 처지, 짝을 잃은 신세 한탄인 고신척영(孤身隻影)도, 사방을 팔 휘둘러 더듬어도 저 혼자만의 잠자리인 고침단금(孤枕單衾)도, ‘고얌 일흔 개가 감 하나만 못하다’는 속담도 스친다. 두 사람이 함께 일구던 정(情)의 뜨락을 그 누구와 다시 경작할 것인가. 네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너 혼자만 울고 모두가 웃었으나 네가 마지막 길 떠날 때는 너만 미소 짓고 모두가 애석히 울어주는 사람이 되라했으니 귀천(歸天)의 길, 흰 국화 한 송이 영정 앞에 바치며 뜨거운 눈물 흘려 줄 한 사람 있음만으로도 행운인가.
부모님 가신 이후의 생은 찬 이슬 맞는 신세로 전락하는 고로여생(孤露餘生)이라 했다. 때로는 부모를, 자식을, 하물며 사랑하는 정인(情人)을 죽음의 세계로 떠나보낸 후 고성낙일(孤城落日)의 참담함에 빠지지 않은 자 있을까. 천붕지통(天崩之痛), 하늘이 와르르 무너지는 아픔은 부모님을 여윈 후의 심정을 이르는 말이며 밝은 빛을 잃는다는 상명지통(喪明之痛)은 먼저 보낸 자식에 대한 심사를 이르는 말 아니던가. 한 발 걸러 두 발이라고 이런 비운(悲運)의 단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가며 반려(伴侶)를 보낸 벗을 기다리는 초조함을 달래는 내 심사도 참으로 얄궂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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