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향월촌 16 > 가을빛 / 시와 산문/ 박부민 시인
가을빛
산마을의 품에 그윽이 안겨드는 부드럽고 따뜻한 이것
흩날리는 은행잎과 찰랑이는 냇물
구수한 팽, 느티, 노간주, 오동나무들
황토밭, 돌담과 기슭에 스며드는
고흐도 고갱도 모네도 모사할 수 없는
영혼의 본색
가깝네 여기 왜소한 어깨에
삭아 내리는 지붕, 널따란 종가집의 마루와
폐교의 작은 운동장, 옛 책상 서랍에
조용히 숨을 쉬고
지팡이를 짚으며 마실 도는
비슬비슬 노인의 굽은 등에도
종일 낟알을 주우려 들판을 부지런히 드나드는
새들의 발톱에도 발갛게
산그늘 노을에 섞이는 골짜기
어린 친구의 맑은 노래를
오래 듣고 있네 바람 지나는 골목에서
이리 오렴 네 가난한 나라의 해밝은 미소를
낮은 굴뚝 사이로 살며시 보여주렴
산마을의 품에 그윽이 안겨드는 부드럽고 따뜻한 이것
모두들 손을 씻으며 젖은 눈으로 보네
반짝이는 온 산의 단풍잎
일제히 등불을 켜고 일어서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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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을의 품에 그윽이 안겨드는 가을빛이 참으로 부드럽고 따뜻하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은행잎과 너볏하게 숱한 세월을 건너온 마을 어귀의 구수한 팽나무, 느티나무도 사랑스럽지만 황토밭과 돌담과 산골짜기에 스며드는 햇살은 어떤 인상파 화가의 그림에서도 볼 수 없는 장엄한 빛을 만든다. 영혼의 본색, 가을빛. 그것은 모사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그 자체가 위대한 예술이다.
가까이에 숨 쉬는 놀라운 가을빛 속에서 한 해 동안의 수확을 정돈하며 안식의 시간을 갖는 집집마다 지친 영혼에 생명의 등불이 켜지듯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그래서 가을빛은 산마을의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속속들이 스며들어가 모든 만물로 평안을 깊이 누리게 한다. 조용하면서도 짙은 가을빛의 위대함.
창조주는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힘 있게 솟은 산과 여러 가을 풍경 들 속에 인생 묵상의 자료들을 펼쳐놓았다. 나무들과 풀들과 돌들과 냇물과 햇빛이 어우러져 곱고 아늑한 산마을의 진한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듯이 사람도 저 풍경 속에서 더 깊어지고 성숙되어 서로 겸허히 살아갈 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람과 산과 나무들이 모두 불을 켜고 잘 어우러져 살아가는 그것이 아름다운 천국의 풍경이다. 가을빛은 천국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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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부민 시인 / 1996년 계간 <시와산문> 신인상 당선 (조병화 시인 選) 2005년 한국크리스챤문학상 수상. 시집『등불이 있는 마을』(시와문화 2010) 현 남도햇빛교회 담임목사 nasaret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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