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향월촌 5> 월하리 / 시와 산문 / 박부민 시인
월하리
가래떡 길게 늘어놓은 오르막길
쫀득거리는 달 아래 첫 동네
가는 귀 먹은 팽나무 이백오십 년째
산바람 빨아 마시며 붙박여 산다
팔랑이는 얇은 세월 한 장 찢어내면
어제인 듯 오늘이 종일 탈탈탈 오르내리고
딸 아들 소식들 먼 구름으로 흩어진 저물 녘
허리에 태엽을 감은 희끗한 달팽이들이
작년보다 느린 속도로 마을회관에 달라붙는다
무릎도 어깨도 눈도 귀도 심상치 않은데
입술을 달구며 아직 내일을 말하는 것은
상의할 것이 있다는 이장의 열변 때문만은 아니다
꽃샘추위로 월출산 오른 쪽 정강이가 다시 시릴 때
잠시 비틀린 골목길에 뒷짐 지고 함께 올라가는
달빛의 꿈을 만났기 때문이다
흐린 지붕마다 한 시절을 부리고 훌훌 돌아가는
기러기 떼의 빛나는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빈 집의 매화꽃이 더 먼저 망울지고
텃밭의 냉이도 쓴웃음을 버린다
얼음 밑에서 아득히 숨을 키워 온 것들이 이 뿐일까
헉헉 질러가려는 조바심만 아니라면
봄을 맞는 윗길과 아랫길은 차이가 없다
달 냄새 박힌 가래떡 끈끈히 떼어 나누며
월하리 회관의 불빛은 오래 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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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에 하얗게 구불거리는 남도의 골목길들은 기다란 애환과 희망을 뒤섞어 쪄낸 가래떡을 닮았다. 심고 거두는 삶의 쳇바퀴. 어제나 오늘이나 혹은 내일이라도 해를 더해 쇠하고 늙어가는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 팽나무와 같은 품새의 세상살이는 그렇게 십 년 백 년 이백 년 흘러가고 오는 것이다.
이렇듯 붙박이의 삶이란 한 편으로는 막막하고 답답한 것이지만 삶의 터전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쫀득하고 어엿한 우리 민중의 자존심의 근거이기도 하다.
겨울 같은 고난과 애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자식들 뒷바라지 하고 소박하게 일가를 유지하는 그런 작은 꿈이나마 버리지 않고 사는 어버이들의 희생적 사랑 때문이다. 천근같은 몸을 곧추세우며 다시 일터로 나아가는 것은 습관적이나마 여전히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비록 그것이 예전 같진 않은 형편 속에서 안개 자욱하여 즉각적이거나 뚜렷한 보장성 없이 힘겹게 골목길을 올라가는 달팽이의 느릿한 행보를 닮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성큼 때가 오면 훌훌 버리고 떠나가야 할 기러기 같은 노년의 그림자가 달빛에 오히려 빛나는 것은 인고의 겨울을 함께 건너 온 우리네 어버이들의 따뜻한 희생과 사랑을 잃지 않고 서로 나누며 사는 두레 정신 때문이다. 빈 집은 늘어가고 버려진 텃밭도 늘어가지만 바로 그 더불어 살아가는 오랜 온정만이 향후 농촌 공동체가 연명할 수 있는 마지막 존속의 끈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조바심을 버리자. 미래에 대한 수많은 비관적이고 불안한 정보들로 산란해지고 무정해진 마음을 바르게 추스르자. 그런 달덩이 같은 소망을 아직 품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일을 의논하는 밤이라면 끈끈한 가래떡 나눠먹으며 새도록 불빛 끄지 않아도 좋을 일이다.
- 녹향월촌에서 박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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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부민 시인 / 1996년 계간 <시와 산문> 신인상 당선 (조병화 시인 選) 2005년 한국크리스챤문학상 수상. 한국크리스쳔시인협회회원. 현 남도햇빛교회 담임목사 nasaret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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