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수업
김현임(수필가· 모란촌문학동인회원)
내 나이 스물 무렵 나는 한 신문의 연재소설에 푹 빠져 지냈다. 무려 서른하고도 다섯 해 전이니 그녀가 거머쥔 고료는 집 두어 채쯤 거뜬히 살만한 거금이었을 터, 강유일이란 여류소설가의 ‘배우수업’이란 작품의 이력이다.
생의 가장 슬프고 어두운 순간은 동시에 생에서 가장 우아한 빛을 발하는 매혹의 순간이기도 한다던가. 정신질환을 앓는 형과 병 든 어머니와 몇 명의 동생들을 거느린 가장 아닌 가장, 그 가난한 연극배우를 사랑하던 여자가 낙태수술을 받는 장면이 소설의 시작이었다. 간호원을 하며 묵묵히 남자의 뒷바라지를 하던 그녀를 안타까이 바라보던 의사, 한 여자를 두고 어둠과 빛의 대비인양 교직되던 그들의 삼각관계는 뚜렷한 결론도 없이 끝났다. 하지만 나는 그 소설로 하여 누군가와 지독히 길고 절절한 사랑을 나눈 느낌이 들었다.
여행지의 한가함을 틈 타 읽는 영화잡지다. 낯 설 만큼 따라 잡기 힘든 세련된 문장들, 그래서 배우수업이 떠올랐을까. 애초 영화의 목적은 주인공의 호소를 관객들이 폭 넓게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거라 했다. 어둠 속 전지자(全知者)가 되어 한 사람이 그의 삶에 마주친 이런저런 장애를 돌파하는 것을 흥미 있게 지켜보는 것이 영화다.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그 배우 고백하기를 영화를 찍는 순간 자신은 철저히 영화 속 주인공으로 살기 때문에 남보다 까다로이 영화를 고를 수밖에 없단다. 더구나 연기는 몇 시간 작정하고 넘어지면 마스터할 수 있는 롤러스케이트가 아니란다. 좋은 감독, 좋은 음악, 좋은 시나리오, 심지어 영화를 볼 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태도까지도 배우의 연기력에 영향을 미친단다. 하여 한 작품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은 배우가 연달아 출연한 다른 작품에서는 자질이 의심스럽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모든 조건이 완벽히 갖춰진 좋은 영화에 캐스팅된다는 것이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는 지름길이라는 그 대목에서 나는 한참 서성인다.
신참내기의 순진함과 무모함이 이 꿈같은 작업에 뛰어들게 했다던가. 성공한 신예감독의 후일담이다. 순진함, 무모함, 꿈같은 작업... . 가만 가만히 뇌까리는 내 앞에 좌르륵 펼쳐지는 색 바랜 필름들, 가끔은 생경스런 현실이 마치 꿈처럼 아득한 영화 한 편, 그러니 삶이란 제명의 영화에서 주인공 아닌 사람 누군가.
아침마다 창 앞에서 밝은 새소리가 잠을 깨웠다는 강유일, 그녀의 나무 많은 집도 그렇지만 미술선생님이었다는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청소나 심부름 등속의 허드레 집안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걸 질색하셨단다. 유년과 학창시절 내내 실컷 책 속에 빠져 지내도록 배려한 아버지도 부러운데 처녀작이랄 수 있는 이 소설을 쓸 무렵 그녀의 애인은 작가의 방을 밝힐 양초를 날마다 사 날랐다고 했다. 그런 강유일의 환경도, 그녀의 ‘배우수업’이란 작품도 내겐 눈부심 그 자체였다.
스무 살의 나로 하여금 소설 속 파격적 상황을 수긍하게 만들던, 오래 전 선망하던 작가와의 해후가 어쩐지 쓸쓸하다. 멋진 배경음악이, 뛰어난 자질을 지닌 제작자가, 완벽한 시나리오가, 마지막으로 함께 감상하는 동반자가 영화 한 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면 삶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엇인가 한 면의 결점 요인이 개인의 삶에 치명적 오점으로 작용하는 것을 영화는 속속들이 보여준다. 그리고 공감이라는 따뜻한 이해를 얻는다. 하지만 삶이란 가혹한 스토리의 영화는 유일한 소통수단인 주인공의 입조차 감쳐물게 만든다. 그로 하여금 진지함과 성실함, 그리고 온건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드는 요인을 오직 혼자서 알고 있으라 강요하는 삶.
나 하나
나 하나뿐 생각했을 때
멀리 끝까지 달려갔다 무너져 돌아온다.
어슴프레 등피(燈皮)처럼 흐리는 황혼
머리 위에
은하(銀河)
우러러 항시 나는 엎드려 우는 건가.
배우에게 눈물 연기 빼곤 온통 엉터리라는 혹평을 듣게 하는 치명적 결핍요소, 그의 목전에 존재하고 있는 그것들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없는 안타까운 영화가 삶이다. 금방이라도 터지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고 여전히 배우수업 중인 이들에게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비록 해독불가의 내용이지만 그의 볼을 타고 흐르는 하염없는 눈물엔 충분한 눈물의 까닭이 있으리라. 그들을 너그러이 바라보는 관객이 되고프다.
-박용래의 시 ‘땅’ 중 부분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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