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만 햇발
過韓明澮 墓 한명회 묘를 지나며
김현임(수필가. 모란촌문학동인회원)
男兒生死義之歸 남아가 죽고 사는 것은 의리에 달렸으니
事或權經聖者知 정도인지 권도인지 성인만이 아시네
伐罪有辭周尙父 죄 있는 자 벌했다고 강태공이 말했으니
如君功業定何其 그대의 공업은 어떻게 평가 되려나
임제 선생의 시집을 무심코 읽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1연 2연의 같은 해석은 그렇고 문제는 3연이다. 有辭가 ‘강태공이 말했으나’에서 ‘강태공의 변명이고’로 바뀌자 한명회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한명회는 세조 때의 원로 공신이다. 그는 布衣에서 떨치고 일어나 상당부원군에 봉해졌다. 지금 그의 무덤은 청주 서쪽 60리 밖에 있다.’ 시가 실린 페이지의 상단에 소개된 이 간략한 설명으로 압구정 한명회라는 인물의 이력을 다 알 수는 없다. 역사 속 등장하는 인물들, 그들을 향한 毁譽褒貶을 어찌 다 열거하겠는가. 한명회, 그만큼 후대에 널리 회자되는 이도 드물다. 마지막 종장에서 그에 대한 직설적 평가를 미루는 느낌이 드는 해석을 택한 이유다.
역사 속 주군을 향한 의를 중시하고 도탄의 위기에서 구국에 투철한 자객의 기록은 두고두고 후세인들을 감동시킨다. 하지만 正道가 아닌 길을 도모하려 갖은 편법을 동원한 세력들의 자취에서 풍기는 악취는 세월 두고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일찍이 사마천은 조말, 전제, 예양, 섭정, 형가를 자객열전에 올렸다. 그 중 조양자에게 번번이 사로잡힌 예양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일갈한다. ‘대장부는 자기를 인정해 준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며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 준 사람을 위해 얼굴을 다듬는 법이다’고. 칠삭둥이로 태어나 긴 세월 파락호로 전전하던 그를 과감히 등용한 수양대군. 그가 조카를 죽이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찬탈한 왕권의 최중심에서 세조를 도와 공신의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 한명회다. 그런 그를 대놓고 질타하지 않은 종장이 더 강도 높은 꾸지람으로 읽힌다. 임제 선생께서는 권모술수를 동원해 한 시대를 풍미한 사나이에게 왜 그다지도 말을 아끼셨을까.
미끼 없는 낚시를 드리운 여상, 강태공이다. 정사는 돌보지 않고 팜므파탈인 달기에 빠져 주색과 충신의 말에 귀 닫아버린 주왕의 횡포를 그치게 할 큰 인재를 향한 긴 기다림의 세월이었다. 이는 모반이 아니라 혁명이었다. 하긴 엄격한 사초도 결국은 승자의 기록이라던가. ‘강력한 왕권을 통해 내전으로 혼란스럽던 나라를 안정시키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근대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훗날 사가들로부터 이런 호의적 평가를 얻은 루이 14세의 이중적 평가가 그렇다. 그가 건설한 찬란한 베르사이유 궁전은 절대군주의 존재를 웅변하고도 남는다. 루이 14세가 남긴 회고록과 법령집, 무수한 공문서 역시 그의 탁월한 통치력을 입증해주는 증거란다. 그런데 오랜 세월에 서서히 박피되는 금박처럼 절대군주라는 화려한 우상 속에 가려진 그의 그림자, 이면에 드러나는 폭정의 진실이다. 재위 기간 이어진 정쟁과 사치 때문에 2000만 프랑스인의 대다수인 농민들은 무거운 세금에 짓눌린 희생양이었다. 또한 중앙정부와 지방사회간의 타협의 산물인 귀족의 비리와 횡포도, 수취구조와 재정제도의 모순도, 그의 사후 70여년 만에 폭발한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이 된 셈이란다.
퉁소소리, 북소리 울리고 뱃전 두드리며 노래하니
환락이 다한 곳에 슬픈 마음 너무도 많아라
이는 당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한무제가 뱃놀이 도중 불렀다는 추풍사 한 구절이다. 부귀와 영화도 다 절기 따라 떨어지는 낙엽처럼 부질없건만 어리석은 인간은 갖은 모욕 속에서도 한 번 쥔 손을 놓지 못하고 바둥댄다. 어차피 한 번 살다가는 인생을 무어 그리 따질 것 있나. 적당히 편안히 살자. 권력과 부를 향해 여름날의 부나비처럼 달려든다. 그러나 냉혹한 역사는 그가 입었던 비단옷자락의 찬란함을 길게 노래하지 않는다. 차라리 남루한 옷을 피로 물들이며 걸었던 한 의인의 형극의 길이 외려 후대인의 길을 밝히는 형형히 빛나는 좌표가 된다.
야구시즌이 막바지다. 홈팀 경기를 응원하면서 우리는 한 노장선수를 말 그대로 질근질근 씹었다. 시원한 한 방을 날리기는커녕 가까스로 번트나 대다가 간신히 진루, 웬 걸 도루를 감행하다 아웃 당하는 꼴이 정말 꼴불견으로 보였다. 그런데 다음날 신문기사에 놀랐다. 감독이 연 이은 팀 승리의 일등공신으로 그를 내세운 것이다. 그의 철저한 희생으로 팀 분위기도 쇄신되고 모든 선수들이 자신의 이익보다는 팀을 먼저 생각하는 희생적 자세를 갖게 되었다는 것. 이 모두가 그 노장선수의 솔선수범의 효과란다. 역사를 보는 오류 가득한 편협의 눈 또한 이 같은 실수다.
하늘을 휘어잡고 땅을 움켜쥐려던 수많은 영웅호걸과 의인, 협객들, 그런가하면 세 치 혀로 권력을 마음대로 조롱하던 간신과 모리배들 그들 역시도 이제 모두 역사의 저 편으로 가고 없다. 賢者에게도 반드시 千慮에 一失이 있으며 愚者에게도 반드시 千慮에 一得이 있다던가. 실수가 곧 인간이란다. 떠돌이 풍류객으로 살아온 임제선생의 사십 년 여정이다. 그동안 당신의 이름은 세상 사람들을 울리고도 남았으나 이제 겨우 학을 타고 티끌세상 벗어났으니 바다의 새로 익은 복숭아나 드시겠다했던가. 이는 고작 서른아홉 해로 마감할 당신의 생을 미리 예견해 쓰신 임제 선생의 自挽이다. 어쨌든 한명회 무덤을 지나는 후세인의 감회가 어찌 분분하지 않으랴. 임제 선생의 시는 차칫 正道를 잃고 권력에 눈멀고 마는 가련한 우리 인생에게 던지는 연민의 시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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