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와 감동이 넘치는 내 고향 추석
장 생 주 / 수필작가
추석명절이다.
어릴 적 내 고향의 추석이 생각난다.
오곡백과 풍성하고 날씨 또한 춥지도 덥지도 않아 그야말로 살맛나는 추석이었다. 게다가 이발하고 목욕하고 새 옷까지 얻어 입었으니 기분은 하늘을 날 것 같은 데, 집안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멀리 가까이서 친척들이 몰려오고 일찍부터 남자들은 밤을 깎고 여자들은 송편을 빚고…. 마을에선 살찐 암소나 돼지를 잡아 집집마다 돌리고….햇곡식 햇과일로 정성스레 차례를 지내고 나면 잔치는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물론 추석은 감사의 명절이다. 살아 계신 부모님과 조상님께 감사하고, 가족들이나, 일가종친들이 모여 선산을 돌며 몇 대조 할아버지 산소까지 찾아 성묘하는 것 또한 조상님께 보은하는 미풍이었다.
그렇게 한나절 산소를 돌고 집에 오면 어떤 때는 학교 운동장에서 면민 체육대회가 열리기도 하고, 금강천 둔치에서 천하장사를 뽑는 씨름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추석명절은 가히 신명나는 한 마당 굿판이었다.
어찌 그 뿐인가. 추석날 밤이면 동산에 두둥실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는 것도 잊을 수 없는 세시풍속이었다. 원래 까치내벌 한 가운데에 위치한 내 고향 하당은 동으로 수인산. 남으로 오봉산. 서북쪽에 월출산. 서쪽에 수암산이 병풍처럼 둘러 쳐있는데, 추석날 밤이면 수인산 봉우리에 떠오르는 달을 보기위해 마을 뒷또랑가로 갔다. 그곳에는 벌써부터 아들이 대학총장을 하는 부잣집 할아버지가 두 손을 모으고 뭔가 빌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면서 내 소원을 빌었다.
그때쯤이면 마을에선 동네방네 떠들썩한 마이크소리가 진동했다. 며칠 전부터 동네 처녀총각들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 공연과 마을 노래자랑이 마을 앞 광장에서 벌어지니 서둘러 오라는 것이었다.
노래자랑에서는 웬만하면 참가상까지 다 주었으니 서울 간 영순이도, 부산 간 길남이도, 목청껏 불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변사투의 맛깔스러운 말솜씨로 청중을 휘어잡던 사회자의 위트와 만담. 그리고 마을 청년들의 연극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 고향 추석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아마도 강강술래가 아닌가 싶다.
어느 해 추석날 밤. 나와 내 누이는 어머니를 따라 새집 큰 마당으로 갔다. 이제 여자들의 신나는 한마당 굿판. 강강술래 공연이 펼쳐질 판이다. 마당에는 마을의 여자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댕기를 따 느린 처녀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들. 휘영청 밝은 달빛.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누구의 선창인가 노래를 부르니 여자들이 마당으로 나와 손에 손을 맞잡았다.
강강술래. 처음엔 천천히 돌았다. 그러나 엄마들이 차츰 신이 나자 속도가 빨라졌다. 빙글빙글 돌았다. 신나게 뛰었다. 우리 어머니도 뛰었다. 노래를 불렀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한 번도 노래라고는 불러 보지 않으시던 어머니! 한 번도 춤이라고는 춰 보지 않으시던 우리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시고 춤을 추셨다.
그 순간만은 여인의 한이며 고초가 눈 녹듯 사라졌으리라. 그 순간만은 시집살이에 고된 며느리도 지아비를 잃은 청상도 시집 못간 노처녀도 한 시름 다 잊고 무아지경에 빠졌으리라. 한 번도 한 눈 팔지 않은 여자들. 한 번도 울 넘도록 소리 한 번 쳐 보지 않던 여자들도 그때만은 소리쳐도 되었고 그 순간만은 방자하게 뛰어도 되었으리라.
강강술래. 강강술래. 들을수록 구성진 가락이었다. 볼수록 흥겨운 춤이었다. 이건 강직함보다는 유연함을, 정체보다는 흐름을, 곧음보다는 다소의 굽힘을, 포용하는 춤이었다. 어딘지 약한 듯하면서도 강하고, 억센듯하면서도 보드라운, 어머니의 심성처럼 고운 여인들의 율동이었다.
하이얀 치마폭에 묻어나는 고운 몸짓은 정녕 바람이었다. 봄날 아지랑이 데불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었다. 한여름 비바람 데리고 불어 닥치는 태풍 같은 성난 바람이 아닌 보드랍고 시원한 미풍이었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이건 여인의 한풀이가 아니었다. 이건 정과 정을 맺는 끈이었다. 어딘지 무심하고 무정한 듯 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나보다는 남을 생각하는 내 고향 여인들의 심성처럼 고운 마음과 마음을 잇는 고리였다. 그것은 무논에서 물꼬싸움으로 말도 않던 이웃 간에도 하찮은 아이들 싸움에 핏대를 올렸던 화해와 용서를 할 줄 아는 호박처럼 둥글둥글한 이웃아줌마들의 너그러운 마음이었다.
밤새워 돌고 돌아도 피곤치 않고 흥겨운 내 고향 여인들의 추석날밤의 군무. 강강술래는 우리네 추석명절의 신명난 감동이었다.
마을축제는 추석명절 다음날도 이어졌다. 다음날은 대개 면소재지 학교 운동장에서 초등학교 가을운동회가 열렸다. 가을 운동회는 학생들과 학부모만의 축제가 아니고 지역의 축제였다. 작천 초등학교 운동회가 열리면 병영사람 옴천사람 성전사람 강진읍 사람. 심지어는 장흥사람 영암사람들까지 구경을 와서 함께 박수를 치고 줄다리기도 하고 동창생 달리기에 끼어, 달리기도 하고 마라톤선수로 뛰었다. 그러다 잘 하면 큰 상도 타 갔다. 아마 운동회의 백미는 6학년 여학생들의 탈춤이나 부채춤. 그리고 강강술래였다. 강강술래는 학생들과 많은 여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운동장을 돌았다.
이렇듯 초등학교 가을운동회는 추석명절에 맞춰 치러지는 지역축제요 감동적인 행사였다.
생각하면 참으로 신명나는 내 고향 강진의 추석이었다. 감사와 감동이 넘치는 추석명절이었다.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는 추수감사. 성묘. 달맞이. 씨름. 마을노래자랑. 마을청소년들의 연극 공연. 강강술래. 면민체육대회. 가을대운동회. 등 그 많은 축제가 어찌 그리도 좋던가. 그 날의 감동이 지금도 그립다.
張生主
월간문학 지로 문단 데뷰.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회원.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역임.
현. 월간「삶을 가꾸는 사람들」편집인 겸 편집장.
저서 : 수필집 「허공을 지나는 한 점 바람」「이 잘 될 놈아」외.
전기집 「다산 정약용」외 공저 수필집 다수. 전남문학상 수상.
강진중앙. 강진동.도암.도암동. 군동금천.마량.옴천. 대구북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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