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어온 길 윤재준 (주)선도소프트 사장 회고록(26회)
동의 환향
미국 생활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미국에서 나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어린 시절 꿈이었던 사업을 하려고 한국에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큰애는 15살로 고등학교 일학년이고 작은 애는 13살로 중학교 2학년이었으므로 가족을 한국에 데려갈 형편이 못 되었다. 거기다 아내는 업무가 줄어서 그 동안 다녔던 스탠포드 대학 부속 SLAC 연구소를 퇴직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저축한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스탠포드 대학 캠퍼스 에스콘디도 빌리지를 나올 때 겨우 장만한 집값을 지불하느라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만 해도 다운 페이먼트 (down payment) 로 집값의 10% 만을 지불하면 집을 살 수 있어서 1978년에 $12,000을 주고 $120,000짜리 집을 마련했다. 미국에서는 회사를 상장시켜 버는 방법 외에는 뭉칫돈을 만져볼 수가 없기 때문에 꼬박꼬박 저축해서 돈을 모으는 길 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업자금은 커녕 가족 생활비와 집 대출에 대한 매월 지불 방안도 막연했다. 그렇지만 무책임하게 일을 저질렀다. 밀워키에서 마켓 대학에 같이 다녔던 김내창씨에게 $10,000을 빌렸다. 그 당시 환율이 600대 1이였으므로 한화로 \6,000,000 이였다. 가족 생활비로 $6,000을 떼어주고 \2,400,000을 가지고 한국에 나왔다. 72년에 미국에 가서 84년에 귀국했으므로 만 12년 만에 돌아온 셈이다.
서울에 돌아온 나는 여러 가지가 막연했다. 서울에 아무 연고가 없었으므로 숙식이 문제였다. 또 한국과 미국에서 사원이나 연구원으로 일했으므로 회사나 어떤 조직의 운영과 경영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돌아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갖고 있는 재산이 거의 바닥이 났다. 그런다고 십여 년 만에 미국에서 갑자기 나타나 친구나 지인들에게 돈을 빌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미국에 가서 나의 진로가 IT 로 바뀌었고 고등학교와 대학 동기들은 대부분 IT 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쉽게 투자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어린 시절 고향에서는 내가 동기생이나 후배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고향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접촉이 이루어졌다.
l 다산 시스템 (Tarsan System) 설립
‘다산’ 이라는 회사 이름은 정조 때 정약용 선생의 호를 빌려다 쓴 것이다. 정약용 선생은 농업 과학 의학을 포함해 모든 학문에 능하실 뿐만 아니라 서구 문물에 일찍 눈을 뜨신 분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또한 나의 고향인 강진 도암으로 귀양을 오셔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많은 저술을 하신 것도 잘 알려진 일이다. 뿐만 아니라 해남 윤씨와는 여러 가지 관련이 있으신 분이다. 정약용 선생의 어머니께서 해남 윤씨 집안에서 오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 외가에서 공부를 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시스템’ 이란 용어는 80년 중반 조금씩 사용하던 터였다.
회사 이름은 지었지만 설립 자금이 문제였다. 큰 집 매형을 생각했다. 매형께서는 돈은 많으시지만 구두쇠로 소문난 분이시다. 담보를 제공하고서도 돈을 빌리기가 힘들뿐 아니라 빌려준 돈을 회수하시는데도 철저하셨다. 그렇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그래서 매형을 찾아가 사업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선뜻 이천만 원을 빌려주셨다. 그 당시로는 이천만 원이 작은 돈은 아니었다. 그래서 주위 친척들이 의외라고 놀라워했다. 그만큼 내가 주위 친척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었다. 사무실 장소는 강남과 여의도를 두고 비교를 했다. 여의도는 임대료가 저렴하지만 교통이 불편하고 빌딩들이 비슷비슷해서 찾아오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강남 제일생명 건너편 동일 빌딩에 사무실을 차렸다. 그리고 사업 내용은 CAD/CAM 시스템과 컴퓨터 그래픽 주변기기를 해외에서 들여와 국내에 팔기로 했다. 이때가 1984년 5월 내 나이 만 42세였다.
CAD 는 Computer Aided Design 의 약자다. 건물, 자동차, 선박, 기계, 핸드폰 및 가전제품 등을 만들려면 이들을 먼저 설계해야 하는데 과거에는 제도판 위에서 수동으로 했지만 CAD 는 이 설계를 컴퓨터로 하는 시스템이다. 컴퓨터를 사용하면 생산성이 수배에서 수십 배까지 향상된다. 과거에 설계했던 자료를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다가 다시 사용할 수 있으며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람끼리 서로 정보도 교환할 수 있고 큰 시스템은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설계할 수 있다. 지금은 은행 업무가 전산 시스템 없이 진행될 수 없는 것처럼 제품 설계에서는 반드시 CAD 가 필요하게 됐다. CAM 은 Computer Aided Manufacturing 으로 자동화된 제작 기계를 말한다. CAD 나 CAM 의 핵심 내용은 컴퓨터 소프트웨어이고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그러한 작업을 지능적으로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당시 CAD 를 아는 사람이 국내에 없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초창기였으므로 CAD 를 들어본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CAD 시스템을 팔려면 반드시 직접 보여 주면서 설명해야만 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고 담당자, 그 다음은 과장, 그 다음은 그 윗선 이렇게 말이다. 왜냐하면 들어보지를 못했으므로 결제해서 구매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지금은 거의 일반화가 되었지만 말이다. 어느 날 금성사 창원 공장에 있는 엔지니어가 회사를 찾아 왔는데 책에서 CAD 를 읽은 적이 있는데 실물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회사에 있는 AutoCAD 를 보여 주었더니 매우 신기해 했다.
이런 방법으로 일년 동안 내내 시스템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보여 주였는데 이문동에 있는 중소기업 사장이 처음으로 2대를 구입했다. IBM PC 기능도 미약했지만 AutoCAD 1.4 버전도 초창기였으므로 대단히 진취적인 회사가 아닌가 싶다. 그 다음 해는 12대를 팔았다. 매출로는 6배 증가한 셈이지만 회사는 적자에 허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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