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감수성
국민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지 않더라도 국민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느껴지고 국민의 분노가 내 분노로 느껴져야 합니다. 그게 본능처럼 돼야 합니다. 그래야 공직자입니다. 이걸 전 감수성이라 부릅니다.
2018년 1월 2일 정부 시무식 신년인사 말씀
총리직을 맡고 처음으로 맞이한 새해, 이 총리는 공무원들과 2018년 새해 다짐을 하는 자리에서 감수성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제가 지난해에도 여러 부처한테 깐깐하게 잔소리를 했던 것 몇 가지를 오늘은 말씀 안 드리는 게 좋을 텐데 그래도 그것 빠지면 어쩐지 맛없는 떡국같이 되니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가 양념처럼 곁들여 꺼낸 것은 공직자가 낮출 것 세 가지, 높일 것 세 가지였다. 먼저 낮춰야 할 세 가지로는 규제와 장벽 그리고 공무원의 자세였다. 높여야 할 세 가지로는 역량, 책임감과 함께 감수성을 주문했다. 역량이나 책임은 공직자들에게는 익숙한 개념이지만 감수성은 어쩐지 낯설 수밖에 없는 단어였다. 그러나 이 총리의 생각으로는 감수성이야말로 공직자에게 매우 중요하게 요구되는 자질이다. 이 총리는 이것을 잔소리라고까지 말하면서 강조하고자 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만큼 사회적 감수성 역시 급속히 변화한다. 최근 민감도가 높아진 것은 ‘경기 규칙의 공정성’이다. 무한 경쟁에 내몰리는 청년들 중심으로 차별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우리 사회가 공정한가’라는 의문과 함께 공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성차별, 고용불안, 권위주의에 대해서도 상당히 민감해졌다. AI 등 기술의 진전들이 불가피하게 가져오는 불평등이나 실업에 대한 우려도 높아졌다. 이런 환경에서 정부나 국회가 기술 변화에만 초점을 맞춘 정책 만들기에 집중하다 보면 중요한 가치들을 놓칠 수도 있다. 개인이 겪는 고통에 무감각해지거나 각자에게 절박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게 된다. 이낙연 총리는 공직자에게 감수성이 중요하게 요구되는 이유를 이런 사회 환경에서 찾았다.
2019년 11월 주유소 수납원 파업 사태에 대한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의 발언이 비판 여론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이 수석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산업계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자동차 산업도 자율주행차 쪽으로 발전하면서 기존 산업의 개념과는 전혀 달라지고 있다.”며 “요금소 수납원이 없어지는 직업이라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가.”라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이 총리는 유감을 표명했다. “경제수석의 4차 산업혁명 운운 발언은 설령 그것이 옳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적 감수성이 결여된 잘못된 발언이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어 총리는 “대법원 판결을 전제로 한 노사 간 협의와 합의가 있었고 이행되고 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한 직원들과 공사 사이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건 안타깝다.”라는 말로 요금소 수납원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공감을 표현했다. 국무총리실의 관료들은 함께 다니며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 총리의 행보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전하기도 했다.
“가는 현장에서 경청하는 모습을 보며 저게 감수성이로구나 생각할 때가 많아요. 이 총리는 행사에 가면 참석자 모두에게 발언 기회를 줘요. 예를 들어 군산조선소 GM 자동차 공장에 가면 현장과 지역의 애로 사항을 다 경청하고 답변을 하세요. 초기에는 그걸 모르고 시간 계산을 못해서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죠.”
“국민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고 국민의 분노를 내 분노로 느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를 실천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감수성을 본능처럼 갖고 있기는 더욱 어렵지요. 그래도 이 총리를 보면서 힘들지만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저 스스로 보게 됐어요.”
이 총리는 가난하고 고단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아마 그는 시장에 좌판을 깔고 있는 할머니들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고, 야근하느라 지친 이들을 보며 방직공장에 다니던 누이를 떠올리고, 고시원에서 지내는 청춘을 보며 친구 자취방을 전전하던 자신의 청년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이 총리에게는 있었다. 옆에서 지켜본 이 총리는 국민이 현실에서 겪을 고충을 놀랍도록 섬세하게 읽어냈다. 저출산 대책을 의논할 때에 이 총리는 단순히 가임여성들의 환심을 사는 정책을 만들기보다는 ‘여성들을 아이 낳는 도구처럼 여기지 말고 아이를 낳기 어려운 여성의 현실이 문지 살펴보고 그것을 개선할 정책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섬세한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결코 쉽게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이뿐 아니라 조류인플루엔자나 구제역이 발생하면 함께 타들어가는 농민의 마음이 돼보기를, 청년 정책을 만들거나 청년을 격려하는 원고를 쓸 때면 청년의 입장으로 돌아가 그들의 고민과 삶을 구체적으로 느껴보라고 강조했다.
남의 불행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불인지심(不忍之心)이라고 말한다. 맹자는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백성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하라.”고 했다. 불행과 고통을 나눌 줄 아는 마음, 그 공감의 힘으로 이 총리는 문재인 정부의 ‘사람 중심’ 정책을 펼쳐갔다. 글 이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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