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회의원보다 특파원이 더 하고 싶었다. 그 기회를 놓치면 나는 무식쟁이가 될 것 같았다. 3년 2개월 동안 나는 일본을 경험했고, 세계를 짐작했다. 내 선택은 옳았다고 지금도 믿는다.
2017년 12월 12일 동아일보 기고문<나와 동아일보>
기자 10년 차, 결혼 9년차에 접어든 1989년에 이낙연은 도쿄 특파원에 내정됐다. 특파원 중에서도 도쿄 특파원은 기자들 사이에서도 실력을 인정받는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코스였다.
도쿄형 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차에 이낙연에게 또 다른 제안이 들어왔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 측에서 정치를 해보면 어떠냐 손을 내민 것이다.
“이훈평 비서관과 국창근 비서관이 찾아와 동아일보 근처 서린호텔에서 만났습니다. 과격하지 않고 학교 제대로 나왔고 젊다는 게 나의 장점이라고 이훈평 비서관이 말했어요. 그때 저는 3 불가론을 폈어요. 첫째, 붓에 물이 한창 올랐다. 지금 꺾기 아깝다. 둘째, 회사에서 도쿄로 가라고 하는데 원하던 곳이라 거절하기 힘들다. 셋째, DJ에게 당신 뜻에 맞는 국회의원 한 명 늘어나는 것보다 당신을 좋아하는 기자 한 명 더 있는 게 나을 수 있다. 내가 아버지 다음으로 DJ를 좋아한다.”(동아일보 인터뷰 2019.7.17.)
당시에는 민주화 바람이 가져온 통일 운동의 열기를 타고 소설가 황석영, 문익환 목사, 전대협 대표 임수경, 평화민주당 서경원 의원의 방북이 이어졌다. 노태우 정권은 이를 ‘공안 정국’으로 몰고 갔고, 서경원 의원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정치를 재개하려는 DJ에게 이는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평민당에서 이듬 해 있을 보궐선거에 내보낼 참신한 인물을 찾고 있던 차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이낙연이었다. DJ 공천을 받아 호남에서 출마하면 당선은 확실하다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이낙연은 여의도 대신 도쿄행을 선택했다.
1989년은 해외여행 자유화의 원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책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베스트셀러가 되며 세계화 바람을 몰고 오던 때였다. 이낙연은 그런 흐름을 범상치 않게 읽으며 자신의 사고를 국제적으로 넓혀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그가 도쿄 특파원을 수행하기 위해 들인 노력을 통해 증명된다.
카투사에서 군 복무를 해 영어는 잘했지만 일본어는 걸음마 수준이던 이낙연은 당장 그해 겨울부터 일본어 공부에 돌입했다. 학원에 초급과 고급 과정을 동시에 끊어놓고 문법을 배우면서 회화를 하는 식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반년 사이에 그의 일본어 실력은 일취월장해 일본의 국민소설가라는 나쓰메 소세끼의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됐다고 한다.
이듬해 현지에 도착해서도 진도가 빨랐다. 각 언론사의 도쿄 특파원들은 서울 손님이 많고 행사도 많아 어느 지역 특파원들보다도 자주 만나는 편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식당과 술집에 들어가면 주문을 하는 건 이낙연 담당이 되었다. 술집에서 알아야 할 안주 목록을 통째로 암기하고, 메뉴별 특성과 술과의 궁합까지 연구한 결과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는 기사에도 반영됐다. 중앙일보 특파원으로 같은 시기에 도쿄에서 활동했던 곽재원 가천대 교수의 회고담이다.
“특파원 사이에서 이 특파원이 쓴 기사에는 ‘꼭 뭐 하나가 더 들어 있다’라고 했습니다. 정치 기사는 인맥이 두텁고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그는 일본 신문을 그대로 번역하거나 정리하지 않고 반드시 추가 취재를 했습니다. 부지란함, 꼼꼼함, 책임감에 풍부한 인맥이 있어서 가능했어요. 한․일 미디어는 서로 단독 협약을 맺고 있었는데 동아일보가 아사히와 제휴를 맺었습니다. 아사히신문 기자들은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만나주지도 않아요. 그런데 이낙연 특파원은 이 네트워크를 뚫고 들어갔어요. 아사히신문사의 고참들은 이낙연을 ‘성실하고 예의 바른 대물(大物)’로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어찌나 현지인들과 친해졌던지 후에 그를 그리워하는 일본인들이 ‘이낙연회’라는 모임을 만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로 치면 삼국유사에 해당하는 일본의 고대 사료 ⌜고지키⌟나 ⌜만요슈⌟를 읽으며 일본의 속살을 들여다보려했다. 역사, 문화, 심지어 노래까지 섭렵하는 그의 치열한 노력에 곽재원 교수는 놀란 적이 많았다고 한다.
“이 특파원의 노래 솜씨는 정평이 나 있습니다. 반드시 이낙연보다 먼저 불러야 덜 민망합니다. 일본인들과도 저녁 모임을 해서 반드시 잘 부르는 일본노래 몇 곡은 갖고 있어야 하는데, 이 특파원은 수십 곡은 너끈히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게 레퍼토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인들도 그런 노래를 어떻게 아느냐 할 정도였지요. 그는 ‘이왕 부르려면 프로처럼 해야 할 것 아닌가’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쯤 되면 그저 잘 아는 ‘지일파’ 정도가 아니었던 셈이다. 한 경제 관료는 이낙연이 일본을 큰 일본과 작은 일본으로 나눠보는 예리한 분석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과 일본인이 좋은 점은 과감하게 칭찬했고, 지적할 부분은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일본 중진 언론인이나 정치인이 그 앞에서 꼼짝 못 한 사례가 있습니다. 물론 국내에선 소위 일본통이라고 불리는 여러 선배나 동료들 앞에서 절대 내색을 하지 않지요.”
3년 2개월 사이에 일본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낙연에 대한 DJ의 믿음은 더 커져 있었다. 그가 성우로 돌아와 일 년쯤 되었을 때 1994년 DJ가 영국 유학을 마치고 아태평화재단을 만들었을 때의 일이다.
“전화를 받고 동교동 자택에 갔더니 두꺼운 원고를 저한테 주시면서 이 원고 좀 고치라고 새서 ‘무슨 원고입니까’여쭸더니 ‘일본 내셔날프레스센터에 가서 연설할 원고다.’ 이걸 좀 이 기자가 고치라고 하니까 ‘아니, 선생님이 쓰신 원고를 제가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그랬더니 ‘그럼 한 가지 물어보자.’라고 물으신 질문이 이거였습니다. ‘흔히들 한일관계를 말할 적에 한국은 과거에 너무 집착하고 일본이 늘 미래지향을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바꿔서 하면 어떨까?’ 이렇게 저한테 물으신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 그것을 어떻게 바꿀 수가 있습니까?’ 했더니 ‘한국이 미래지향을 강조하고 일본이 과거를 좀 더 보게 하는 쪽으로 하자고 제안하면 어떨까? 그런 메시지를 이 원고에 담고 싶은데 어떤가?’ 그래서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참 신선한 아이디어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렸지요.”
<김대중‧오붙이 공동선언 20주년과 동아시아 미래비전 기념식 만찬사. 2018.10.23.>
그로부터 4년 뒤인 1998년 DJ는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일본 의회에서 자신이 생각한 한일관계에 대한 비전을 연설로 밝혔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습니다.’라는 역사에 남을 명문도 있던 연설이렀다.
2000년 이낙연은 국회의원이 되었다. 정계에서 ‘지일파’ ‘일본통’으로 불리며 이후 개선되지 않은 한일관계를 풀려고 다방면으로 애써왔다. 한일의원연맹 간사장과 수석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과 이력은 2019년 한일관계가 강제진용 판결과 수출 규제 문제로 얼어붙어 있는 상황에서 이낙연 총리를 구원투수로 등판하게 했다. 29년 전 아키히토 전 일왕의 즉위식을 보도했던 도쿄 특파원 이낙연이 한 세대가 지나 아들의 즉위식에 총리가 되어 참석한 것이다.
이 총리는 일본을 방문한 2박 3일간 한시의 짬도 없이 회담을 계속했다. 도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 누카가 후쿠시로 일한의원연맹회장 등 정‧재계의 인맥을 두루 만나며 두 나라 사이의 꼬인 문제를 풀려 했다. 마지막에는 아베 총리와 만나 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며 한일관계에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30여 년 전의 추억을 회상할 만큼의 짧은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도 피곤함 속에서 활기가 넘쳤다. 도쿄 특파원 이낙연은 그렇게 대통령의 특파원이 되어 맹활약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총리가 썼던 이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국회의원보다 특파원이 더 하고 싶었다. 그 기회를 놓치면 나는 무식쟁이가 될 것 같았다. 3년 2개월 동안 나는 일본을 경험했고 세계를 짐작했다. 내 선택은 옳았다고 지금도 믿는다.”
글 이제이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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