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지붕 아래 7남매
저에게 팥죽은 따뜻함(추운 겨울에 따뜻한 안방에서 할머니 어머니와 7남매가 모여 뜨끈한 팥죽을 후후 불어가며 먹던 기억) 달콤함(단팥죽보다는 덜 달지만 팥의 원래 맛 그대로의 팥죽 맛) 넉넉함(먹고 난 뒤의 편안한 포만감)의 음식입니다.
2013년 12월 4일 블로그(이낙연의 힐링 스토리)
누구에게나 추억어린 음식이 있다. 이낙연에게는 팥죽이 그런 음식 중 하나다. 국회의원 시절에 한 토크쇼에 출연해서 그는 가족들이 모여 뜨끈한 팥죽을 먹던 오래전의 풍경을 떠올린 적이 있다. 너무나 가난했기에 어린 시절을 추억할 사진은 없지만 팥죽의 맛과 향이 그의 기억 속에 잠겨 있는 그리운 장면을 불러왔던가 보다.
7남매는 우애가 좋았다. 첫째 연순부터, 낙연, 금순, 하연, 계연, 인순, 막내 상진까지 4남 3녀는 하나같이 착하고 야무졌다. 동네 사람들 기억에 이 집은 어머니가 늘 아이들 공부시키는 집이었다. 다섯째 계연의 회고에 의하면 형제자매가 서로 배운 걸 놓고 토론을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단어 하나를 두고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어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여러분들!’이라고 말을 꺼내면 ‘여러분은 복수이니 여러분이라고 해야 한다’는 둥 하나씩 따지면서 얘기했지요. 성격이 ‘까칠하다’라고 하면 그걸 시작으로 꺼칠하다, 가찰하다, 거칠하다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쓰는지를 찾아보는 거예요. 집안 분위기가 그랬어요. 꽤 학구적인 대화를 나눴던 셈이죠.”
이낙연의 엄격한 단어 사용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7남매는 삼덕초까지 1키로미터 남짓 되는 거리를 마을 아이들과 모여 장난치며 걸어 다녔다. 이낙연 동생이라고 하면 급장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장남 이낙연의 총명함은 마을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 며칠 사이에 이낙연은 출석부에 있는 같은 학년 40여 명의명단을 모조리 외웠다. 1번 남궁오채, 2번 이기철, 이런 식으로 혼자서 출석부를 중얼거리곤 하였는데, 그런 모습에 아버지는 무척 흐뭇해 하셨다고 한다.
학교에 가면 저마다 남부럽지 않은 우등생이었지만 너무나 잘난 장남의 그림자에 가려 누나와 다섯 동생들은 상대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른 형제자매들로서는 좋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집안에서는 장남만 특별 대접을 받을 때가 많았다. 딸기가 익는 5월이 되면 동생들은 눈뜨자마자 딸기밭으로 달려갔지만 낙연은 느긋하게 늦잠을 잤다. 이미 할머니께서 큰손자를 위해 잘 익은 딸기를 챙겨놓으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장남은 딸기에 얽힌 동생들의 설움을 알게 되었다. 명절 어느 날, 한 동생이 이런 말을 하더란다.
“딸기가 크면 빨개진다는 걸 나는 중학교 들어가서야 처음 알았네.”
밉상이다. 그래도 누이와 동생들은 극진히 아끼는 형이니 달리 할 말이 있겠는가.
낙연은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이었지만 한편 친구, 동생들과 뛰놀기 좋아하는 철부지이기도 했다. 인순과 금순 두 여동생은 중학생 때의 오빠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
“오빠랑 제가 띠동갑이니까 제가 서너 살 때인데, 방학 때 집에 오면 꼭 저를 업고 놀러 나갔어요. 그리곤 연 날리는 솜씨를 신나게 보여주었어요. 그때 오빠는 연을 참 잘 날렸어요.”
“저희 남매들은 운동신경이 둔해서인지 몸 쓰는 걸 잘 못 했어요. 달리기 하면 늘 뒷자리 등수를 맡아놨었죠. 낙연 오빠도 몸치인 것은 똑같은데 이상하게도 연날리기는 잘했어요. 어릴 때부터 정확하게 균형을 맞춰서 연을 만들고 하는 데 재주가 있었어요.”
노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장남의 책임감을 안고 살았다. 신세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 탓에 마음에 부담이 더 컸다. 막내여동생 인순에게는 이런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오빠는 ‘내 몸이 내 몸인 게 하나도 없다’라고 했어요. 부모가 가난하니까 ㄴ누군가 많이 도와줬는데, 신세진 거 생각하면 팔은 누구 거고, 다리는 누구 거고, 이렇게 말했어요. 용돈 하나 받은 것도 다 빚이라는 겁니다. 그런 걸 기억하고 살아요. 훗날 오빠가 돈을 벌기 시작해 시골에 와서 동네 한 바퀴 돌면 지갑이 텅텅 비어요. 어려운 사람들 다 주고 온 거죠. 그래도 오빠는 이렇게 말해요. 괜찮아 인순아. 오빠 지갑은 정거장이야.”
어른들도 어린 이낙연에게 어른 대접을 해왔고, 그도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웠다.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젊을 때부터 자신만의 삶을 산 적이 없다. 취직한 뒤 어느 날엔가는 동생 계안을 찾아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제가 고3때였어요. 형이 대학 졸업하고 투자신탁회사에 취직해 다닐 때인데, 어느 날 갑자기 시골에 있는 하교까지 찾아왔어요. 학교 뒤 빵집에서 둘이 마주앉아 얘기하는데, 대뜸 저보고 대학을 가라는 거예요. 지금 내 월급이 한 달에 얼마인데 국립대학은 등록금 대줄 수 있으니까 꼭 대학을 가라. 그런 식으로 형은 자신이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
두 살 위의 누나도 말없이 챙겼다. 이낙연은 신문사에 들어가면서 결혼한 누나네 얹혀살겠다며 짐을 들고 누나네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누이 연순은 그것이 이낙연식의 보호법인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30대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애들 키우고 있으니 아마 자기가 누이를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어릴 때부터 업고 다니던 막내 여동생에게는 더 애틋했다. 한번은 속 안에 가둬 둔 울음을 터트린 적도 있다. 동생 인순의 기억이다.
“아버지 탈상 날 온 가족이 모였어요. 그때 재가 참 어려운 시기였는데, 남편 일찍 떠나보내고, 이듬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였거든요. 그때 큰 오빠가 도쿄 특파원 할 때인데, 저를 끌어안고 우는 거예요. 문상객들이 주는 술을 받아 드시고 취하셨는지, 내게 정말 미안하다고, 오빠가 무능하다고,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뭘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줄 수 있는 건 오직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마음뿐이다. 이낙연을 비롯한 7남매는 가진 게 얼마든 하는 일이 무엇이든 형제자매 사이에 우애 좋게 지내면 최고라 여긴다. 우애가 있기에 가난하지만 가난한 줄 몰았고, 고단해도 고단한 줄 모르고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이낙연이 기자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도지사가 되고, 일국의 총리가 되어도 달라진 건 없다.
어머니는 “부모가 못나고 능력이 없어서 너희가 고생이 많다”라며 미안해했지만 한편 “시간이 지나면 자식들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꿈을 갖고 살았다. 그 꿈대로 7남매는 살고 있다. 대학을 보내지 못해 어머니가 속상해했던 자식들은 만학도로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사업을 하기도 하고 어린이집을 운영하기도 하면서 제자리에서 제몫을 하고 있다.
지금도 7남매는 한번 모였다 하면 그간 못 나눈 얘기를 하느라 시간 간 줄을 모른다. 따뜻한 방에 모여 앉아 후후 불어가며 팥죽처럼 7남매가 나누는 대화는 따뜻하고 달콤하고 넉넉할 것 같다. 그 진심어린 형제자매의 대화가 이낙연에게는 최고의 보약이 되지 않았을까.
글: 이제이 <다름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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