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준 (주)선도소프트 사장 회고록(1)
내가 걸어온 길
어린 날들
l 빨강 투피스
6.25 가 바로 지나간 가난한 시절에는 눈은 풍성했듯 싶다. 겨울이면 5cm 이상 되는 눈이 자주 오곤 했다. 그 날은 눈이 쌓이고 바람도 조금 있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항촌에 사시는 큰 아버지께서 외출 후 돌아오시면서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사람을 뒤에 달고 오셨다. 빨강 투피스에 하이힐 구두를 신은 20대 중반의 여자였다. 세상에 저런 여자가 있나 싶었다. 하이힐과 투피스를 입은 사람은 처음 본 셈이었다.
나의 고향 도암은 강진에서 12km 남쪽으로 완도로 가는 길목에 있다. 면 소재지가 있는 큰 들판에 들어서려면 석문산의 가파른 바위계곡을 지나야 한다. 서쪽으로는 주작산까지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동쪽과 남쪽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농지가 되었지만)은 바다였다. 말하자면 사각형 도암면이 두변은 산이요 두변은 바다인 셈이다. 거기다 석문과 서석문 골짜기에서 출발한 냇물이 면소재지를 앞뒤로 지나가면서 바다 근처에서 서로 만나는 지형이다. 말하자면 산과 바다, 내와 들판이 어우러져 있어 산나물과 해산물 여러 가지 민물고기가 풍성했다.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산과 바다 내와 들판으로 돌아다니며 놀기에 안성맞춤인 시골이었다.
지금은 아스팔트 포장이 다 되었지만 그때는 자갈길에 차선이 하나여서 버스가 겨우 서로 비켜갈 수 있는 도로였다. 강진 읍까지 버스로 30분 이상 걸렸지만 아주 먼 곳으로 느껴졌다. 왜냐하면 버스가 드물게 다녔기 때문이다. 광주까지는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 가본적이 없었지만) 4~5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강진 읍에서 8km 그러니 도암면 소재지에서는 4km 되는 곳이 계라리 삼거리다. 여기에서 도암 완도로 가는 길과 해남 읍으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이 날은 계라리에서 해남으로 가는 버스가 눈 때문에 가지 못한다고 해서 큰 아버지께서 빨강 투피스 여성을 우리 집으로 데려 오신 것이다. 지금은 계라리에 멋진 호텔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여관이나 호텔이 없으므로 버스가 길에서 움직이지 못하면 민가 외에는 오고 갈 데가 없었을 것이다. 이유인즉 결혼하러 가는 도중에 우리 집에 묵게 된 것이란다. 그 천사와 같았던 숙녀도 살아 있다면 80세 전후의 할머니가 될 터이다.
l 굼벵이
저의 어머니께서는1918년 생이시니 말띠인 셈이다. 형제들이 많아서 처녀 시절에는 동생들을 잘 돌보는 성숙한 효녀이셨던 것 같다. 어머니의 할머니께서 일찍 남편을 여의시고 경기도 부천 소사 근처에서 목포로 내려와 정착하셨단다. 그러니 어머니 고향은 목포가 되었고 목포에는 외삼촌과 이모들의 식구가 많았었다. 그 시절에는 여자가 말띠이면 여러 가지 말이 많았을 텐데 아버지께 늦게 시집 오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해남 윤씨로서 오랫동안 도암면에 터를 잡고 살고 계셨다. 아버지께서는 광주 농업 학교를 졸업하셨으니 어머니께서는 손해 보신 것 같지 않은데 사시면서는 항상 불만이 많으셨던 것 같다.
나는 목포에서 출생했다고 들었다. 내가 출생 당시 아버지께서는 일본 회사 마루보시에 근무하셨다.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사시다가 아마 나를 출산하실 때는 어머니만 친정인 목포에 내려오신 모양이다. 내가 1살 때 다시 평북 삭주에서 사시고 그 다음 보성으로 해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식량 보급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져 내가 3살 경에 도암으로 내려오셔서 향촌 큰댁 사랑채에 자리를 잡으셨다.
이 즘에 부모님께서 어려운 생활을 하셨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직장도 없으셨고 농사일도 못 하셨으니. 거기다가 2차 세계대전 막바지라 일본 정부의 발악은 최고조에 달하지 안 했겠는가? 아버지께서 30대 후반이셨을 테니 아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게다. 식생활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방에는 바닥에 볏짚을 엮어 만든 덕석을 깔고 살았다.
동생 기향이가 출생한 후 1살 정도 된 듯싶다. 고열에 의식을 잃을 정도였으니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지금은 면 소재지에는 보건소가 있고 10분 거리인 강진 읍에는 강진 병원 등 의료시설이 갖추어져 있지만 그 당시는 생각할 수 없는 환경이다. 지렁이를 볶아서 먹이고 내가 놀란 것은 큰댁 헛간 짚 지붕에서 잡은 엄지손가락만한 산 굼벵이를 동생에게 생체로 먹인 것이었다. 한번은 삼형제가 한꺼번에 수두에 걸려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던 굼벵이가 효과가 있었던지 동생은 살아서 서울 법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지금은 미국 플로리다 아트랜틱 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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