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있는 경영자
“수산(水産)을 넘어 산업(産業)으로” 그는 회사명에 ‘수산’이 아니라 ‘산업’이란 명칭을 붙였다. 수산업으로 사업을 시작하지만 성실히 기업활동을 해서 다른 사업으로 범위를 넓혀가겠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경영이 단순히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의 영리활동만이 아니라 “영리활동을 통한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김재철의 발상은 비슷한 연배의 다른 인물을 생각나게 한다. 교세라 그룹의 창업저인 1932년생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창업 전 4년이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쇼후 공업을 다녔다. 자신의 삶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건은 처음으로 ‘필로소피’라는 말을 알게 되었을 때라고 회고한다. 부실이 심한 쇼후 공업을 방문한 나이이치 물산의 요시다겐조는 20대 중반인 이나모리가 회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내놓는 아이디어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때 겐조가 툭하고 던진 말이 이나모리의 가슴에 각인된다. “아직 20대 중반인데 훌륭하군 그래. 자네에게는 남다른 인생철학이 있어.” 이나모리는 당시에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1959년 4월 1일에 교토세라믹을 창업해서 굴지의 대기업을 키워낸 것은 젊은 날 그가 품었던 철학의 힘이 컸다고 말한다. 이나모리 회장은 “교세라 창업 때부터 나는 인간의 마음이나 원리원칙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중요하게 여겨왔다”고 술회한다. 김재철 역시 사업 초기부터 철학이 있는 경영 혹은 원리원칙이 분명한 경영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다.
사람도 사업도 철학이 있어야 한다. 단시간에 요령이나 행운으로 돈을 벌 수 있겠지만 영속적인 기업이 되려면 경영자의 철학이 필요하다. 그는 자신이 변화시켜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뚜렷이 구분해왔다. 사세가 확장되면서 김재철의 경영방침이나 수단은 달라졌지만 경영철학은 변함이 없었다.
신의와 성실로 매일을 산다
김재철의 인생관은 “매일 성실하게 산다” 혹은 “매일 전심전력을 다한다”라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인생철학 ‘성실’은 경영철학으로 이어진다. 성실은 ㄱ의 인생과 사업이 만나는 정점이다. 성실은 매사에 열과 성과 혼을 다해 포기하지 ㅇ낳고 끝까지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진실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뜻한다. 가난한 시골에서 자란 그는 대가족의 맏아들로서 “자신을 책임져야 하고, 나아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훗날 사업을 시작할 때는 책임의 범위가 자신과 가족, 나아가 회사와 사회와 국가로 확대된다. 그는 책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런 인생관이 고스란히 창업이념에 스며들어 있다.
이런 생각을 더욱 단단하게 한 것은 선상생활이었다. 그는 50미터가 채 되지 않는 참치 연승어선에서 20-30여 명의 선원들과 고락을 나누었다. 이곳에서 선원들은 선장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게 된다. 가식적이거나 솔선수범하지 않는 태도는 그대로 영향을 끼친다. 그는 성실하고 겸허한 사람임을 온몸으로 보여주어야 했다. 긴장을 풀거나 방심하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선장은 승부의 세계에서 성과로서 책임을 져야 했다. 순발력으로는 지속적인 성과를 낼 수 없었다. 그는 청년기부터 치열한 프로의 세계에서 살았고 성과를 보여주어야 하는 경주를 하면서 성실과 근면을 제2의 천성으로 삼았다. 삶의 경험에서 체득한 것들이 기업의 경영철학으로 옮겨갔다. 이처럼 신의와 성실로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성실한 기업활동’이란 창업이념과 경영에 반영되었다.
성실한 기업활동으로 사회정의 실현
정의란 무엇인가? 올바른 기업은 어떤 기업인가? 올바른 경영자는 누구인가?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정의를 해석하는 방법이 있다. 플라톤은 “사회에서 정의는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의 직분을 최대한 잘 발휘한 상태”라고 말한다. 이는 혼란스럽지도 않고 질서가 있으며 절재된 상태에서 각자가 자신의 직분을 최대한 잘 수행하면 그 직분 안에는 개별적 정의론이 다 포함되어 있다. 즉 플라톤의 정의론은 국가든 개인이든 각각을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들이 최고의 기능을 발휘해 이들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형성된 상태를 말한다.
김재철의 정의론도 플라톤의 그것과 상통한다. 그의 정의론은 선상생활에서 비롯되었다. 30여 명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참치 연승어선은 하나의 작은 사회다. 조업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한판 승부다. 선장, 기관장, 항해사, 선원이 각자의 직분을 최대한 잘 수행해야 최고의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선장만 잘해서도 안 되고 선원들만 잘해서도 안 된다. 이런 경험들이 그에게 정의와 올바름에 대한 견해를 갖게 했다. “성실한 기업활동으로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창업이념에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역할을 다해야 하고, 기업은 이익을 남김으로써 맡은 바 직분을 다할 수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기업에게 요구되는 사회정의의 몫을 다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회정의의 실현’을 강조했다.
그에게 기업의 직분은 합법적인 활동을 통해서 이익을 남기고 고용을 창출하며 납세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개개인이 자기 직분을 잘 수행하듯이 기업 역시 지속적으로 이익을 창출해야 하며 이것이 ‘사회정의의 실현’이라고 믿었다. 김재철은 창사 이래 두 번의 적자를 기록했는데, 그는 이를 몹시 부끄러워했다.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참담하게 여겼다.
또한 그는 나라의 도움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지 않았으며 부실 경영으로 국가나 납세자에게 어떤 부담을 주지 않았다. 1996년 1월 6일 사장단 회의에서 그는 지속적인 흑자 달성과 사회정의의 상호관계에 대해 말한다.
“사장님들께서 회사를 경영하실 때 목표로 삼을 것은 첫째 흑자경영을 하는 회사이고, 둘째 1인당 생산성이 업계 최고인 회사이며, 셋째 업계에서 최고의 업적을 내는 회사여야 합니다. 저는 기업경영은 인류와 국가에 공헌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적자를 내는 기업은 죄악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기업경영 철학은 ‘정도경영’을 하는 것, 결과뿐만 아니라 프로세서도 중시하는 도덕경영입니다.”
기업경영에 대한 이 같은 시각은 기업활동에 대한 확고한 견해로 나아간다. 그는 기업활동은 반드시 이익을 남길 수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회필요기업
“무엇이든 잘 만들어야 한다” 그의 경영철학 한 축은 정도경영이고 다른 한 축은 품질경영이다. “품질경영이란 바로 내실경영입니다. 알맹이는 없고 소리만 요란해서는 안 됩니다. 품질경영을 하면 결과적으로 흑자경영이 될 것이고, 이를 위해서 사원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여 1인당 생산성을 최고로 높여야 합니다. 이를 유념해서 여러분들은 정도경영, 품질경영을 실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장님들의 특별한 리더십이 요구될 것입니다.”
김재철은 창업이념의 현대화 작업을 한 차례 수행한 적이 있다. 창립 24주년을 지낸 지 3개월째 되던 1993년 7월 1일 ‘동원 가치체계 선포 및 경영혁신 전진대회’를 개최하면서 동원의 기업비전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회필요기업”이라고 선언했다. 이때 만들어진 기업비전은 창립이념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그릇에 담은 것이었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정체성이 흔들리면 위기가 온다. 정체성은 단 하나, 즉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질문은 개인뿐 아니라 조직에도 매우 중요하다. 그는 사회에 존재함으로써 사회에 크게 기여하는 기업을 ‘사회필요기업’이란 용어로 정리했다. 이는 사회정의가 실현되고 확장되고 구현되어 궁극적으로 나타나는 기업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기업이어야 한다”는 비전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고객에게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가치를 전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고객을 감동시킬 수 있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가치를 계속 만들 수 있는 기업이야말로 경이로운 기업이자 탁월한 기업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재철이 꿈꾸는 기업의 상이다. 이를 종합하고 초기의 창업비전을 더욱 구체화하여 1993년부터 김재철은 기업비전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시회필요기업”이라고 천명했다.
경영이념을 토대로 한 기업비젼 역시 1993년 7월 1일에 발표된다. 경영이념은 “모든 경영 활동의 기본적 가치, 태도, 신념의 기준으로 의사결정과 행동의 자료가 되며, 경영활동의 우선순위 결정 및 경영자원의 배분에 기준”을 말한다. 김재철의 창업이념은 다음의 세 가지 경영이념으로 구체화되었다. 첫째, 고객에게 기쁨을 주는 경영, 둘째, 사람을 존중하는 경영, 셋째,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경영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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