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열전(3)
형가(1)
형가(刑軻)는 위나라 사람이다. 그의 조상은 제나라 사람이었는데, 형가가 후에 위나라로 옮겨 오자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경상이라 불렀다. 그후 연나라로 가자 연나라 사람들은 그를 형경이라 불렀다.
형가는 독서와 검술을 좋아했는데, 그는 검술로써 위나라 원군에게 유세했으나 등용되지 않았다. 그후 진나라는 위나라를 쳐서 동군을 설치하고 위나라 원군 일족은 야왕으로 옮겨 살게 했다.
형가가 유랑하던 시절, 유차라는 곳을 지나다가 갑섭이란 자와 검술을 겨룬 적이 있었다. 갑섭이 화를 내면서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형가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어떤 사람이 갑섭에게 형가를 다시 불러 겨루어 보라고 하자 갑섭이 말했다.
“전에 나는 그와 검술을 겨루었소. 내가 비위가 거슬려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그는 바로 떠나버렸소. 아마 이곳에 없을 것이오.”
이에 형가의 숙소로 사람을 보냈더니 형가는 수레를 타고 이미 떠난 뒤였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와 보고하니 갑섭이 말했다.
“물론 갔을 테지. 내가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으니 말이야.”
형가가 한단에 머물 무렵에는 노구천이란 자와 장기를 두다가 말다툼을 했다. 노구천이 화를 내며 큰소리로 꾸짖자 형가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나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그후 연나라로 간 형가는 개 잡는 백정과 축(대나무로 만든 악기)을 잘 타는 고첨리와 가깝게 지냈다. 형가는 술을 좋아해서 날마다 그들과 함께 연나라 저자에서 술을 마셨다. 술이 거나해지면 고첨리는 축을 타고 형가는 그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서로 즐기다가도 어느 때는 울기도 했는데, 마치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침착하게 행동했다. 형가는 비록 주정꾼들과 놀았지만 그 사람됨은 침착하고 독서를 즐겼으며, 제후국들을 돌아다니면서는 현인·호걸들과 사귀었다. 형가가 연나라에 왔을 때 처사 전광선생은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전광은 형가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연나라 태자 단(丹)이 본국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태자 단은 일찍이 조나라에 볼모로 간 적이 있는데, 진나라 왕 정(나중 시황제) 또한 조나라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둘은 사이좋게 지냈다. 그후 정이 즉위하여 진나라 왕이 되었을 때 단은 다시 진나라 볼모로 갔다. 진나라 왕은 그를 잘 예우하지 않았다. 이에 태자 단은 원한을 품고 도망쳐 돌아온 것이다.
태자 단은 돌아온 날부터 진나라 왕에게 복수할 방법을 모색했지만 나라가 작아 힘이 모자랐다. 그후 진나라는 계속해서 산동으로 출병하여 제나라, 초나라, 삼진을 쳐서 제후국의 땅을 잠식했고, 이윽고 연나라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연나라 군신들은 모두 화가 나라에 미칠까봐 두려워했다. 태자 단은 걱정되어 태부인 국무에게 물었다. 국무가 말했다.
“진나라 땅은 천하를 뒤덮어 한나라·위나라·조나라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가천산과 곡구 같은 튼튼한 요새가 있고, 남쪽으로는 경수와 위수 같은 기름진 땅이 있으며, 파와 한중 같은 풍요한 지대를 차지하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농과 촉 같은 산이 있으며 위쪽으로는 관과 효 같은 험한 산이 있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많고 군사들은 용감하고 무기와 갑옷도 넉넉합니다. 만약 진나라가 다른 나라를 치려고 한다면 장성 이남과 역수 이북(연나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찌 박대를 받았다는 원한 때문에 진나라의 역린을 건드리려 하십니까?”
단이 말했다.
“그리하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국무가 말했다.
“물러가 계책을 생각해 본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진나라 장수 번어기가 진나라 왕 정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로 도망쳐 왔다. 태자는 그를 받아들여 관사에 머물게 했다. 이에 국무가 나서 간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폭군인 진나라 왕이 이미 연나라에 노여움을 품고 있어 앞날이 풍전등화와 같습니다. 하물며 번 장군이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주린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고기를 놓은 것’과 같이 화를 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비록 관중과 안영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속히 번 장군을 흉노로 보내시어 진나라가 공격해 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서쪽으로 삼진과 동맹을 맺고 남쪽으로 제나라·초나라와 연합하고, 북쪽으로 흉노의 왕인 선우와 친하게 지낸다면 진나라의 공격에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자가 말했다.
“태부의 계책은 너무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나는 마음이 산란하여 잠시도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또한 번 장군이 천하에 몸 하나 둘 곳이 없어 내게 왔는데, 어떻게 흉포한 진나라의 협박을 두려워하여 불쌍한 친구를 흉노에 보낸단 말입니까? 그런 일은 내가 죽은 뒤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태부께서는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국무가 말했다.
“위험한 일을 하면서 안전하기를 바라고 화를 만들면서 복을 바라는 것은, 얄팍한 계책으로 원한만을 남길 뿐입니다. 새로 사귄 친구를 위해 나라에 닥칠 큰 화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이른바 원한을 쌓고 화를 크게 하는 것입니다. 기러기 털을 숯불 위에 태우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입니다. 독수리와 같은 진나라가 원한을 품고 노여움을 불태운다면 그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연나라에는 전광 선생이란 분이 있는데 사람됨이 지혜롭고 용기가 있습니다. 그와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태자가 그 말을 듣고 반기며 대답했다.
“태부를 통해 전 선생을 사귀고 싶습니다.”
국무가 대답했다.
“명을 받들어 전광 선생을 모셔 오겠습니다.”
국무는 전광을 만나 말했다.
“태자께서 선생님과 국사를 의논하고 싶어 하십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전광은 태자를 찾아갔다. 태자는 몸소 마중을 나와 그를 맞아들였다. 태자는 무릎을 꿇고 전광이 앉을 자리를 손수 닦았다. 전광이 앉고 좌우의 사람들이 나가자 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르침을 청했다.
“연나라와 진나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전광이 말했다.
“준마는 한창 힘을 쓸 때는 하루에 천 리도 달리지만 늙고 쇠약해지면 느린 말도 앞지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태자께서는 제가 한창 힘을 쓸 때의 이야기를 듣고 저의 힘이 이미 쇠진해진 것을 모르십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 국사를 돌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의 친구인 형가는 쓸 만한 인물입니다.”
태자가 말했다.
“선생을 통해 형가를 만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전광이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광이 일어나 물러가려고 하자 태자가 문까지 전송하여 이렇게 당부했다.
“나와 선생이 나눈 말은 모두 국가의 대사이니 선생께서는 이야기가 새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 주십시오.”
전광은 머리를 끄덕이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광은 늙은 몸을 이끌고 형가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나와 당신이 친하다는 것은 연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소. 오늘 태자는 내가 힘을 좀 쓸 때의 이야기를 듣고 내 몸이 이전보다 못한 것을 모르시고 황송하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연나라와 진나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태자에게 추천했소, 그러니 태자를 찾아가기 바라오.”
형가가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광이 말했다.
“듣건대 덕이 있는 자는 행동하면서 남의 의심을 사지 않는다고 하였소. 오늘 태자께서는 ‘우리가 서로 나눈 이야기는 국가의 대사이니 새나가지 않도록 조심해 주십시오’라고 했소. 이는 태자께서 나를 의심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요. 남의 의심을 받는 것은 절개 있는 협객의 행동이라 할 수 없소.”
그러고는 형가를 격려하며 말했다.
“당신은 속히 태자를 찾아가 이렇게 전하시오. 전광은 이미 죽었고 비밀은 영원히 간진될 것이라고 말이오.”
말을 끝낸 전광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형가는 태자를 만나 뵙고 전광이 이미 죽었음을 알리고 그의 말을 전했다. 태자는 재배한 후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태자가 말했다.
“내가 전 선생에게 누설하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은 큰일을 이루기 위함이었소, 전 선생께서는 죽음으로써 비밀을 지키셨지만 어찌 그것이 나의 본심이었겠소.”
형가가 앉자 자리에서 일어난 태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전 선생은 내가 불초한 줄도 모르고 당신께 나의 일을 의논할 수 있게 했소. ㅇ는 하늘이 연나라를 불쌍히 여기시어 나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오. 지금 진나라의 탐욕은 끝이 없소. 그들은 천하의 땅을 다 차지하고 제후국의 왕들을 신하로 삼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을 것이오. 진나라는 이미 한나라 왕을 사로잡고 그 땅을 모두 차지했으며, 남쪽으로는 초나라를 치고 북쪽으로는 조나라에까지 이르렀소. 왕전은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장과 업을 쳤고, 이신은 태원과 운중으로 출병했소, 조나라가 진나라의 공격을 막지 못한다면 항복할 것이고, 그리되면 그 화는 연나라에까지 미칠 것이오. 연나라는 약한데다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시달렸기 때문에 온 나라가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 해도 진나라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오. 제후국들도 진나라에 굴복하여 감히 우리와 연합하지 않을 것이오.
내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천하의 용사를 구하여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큰 이익을 미끼로 진나라 왕의 탐심을 자극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소. 그런 다음 조말이 제나라 환공에게 했던 것처럼 진나라 왕을 협박하여 그가 빼앗은 제후국의 땅을 모두 돌려주게 한다면 가장 좋을 것이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기회를 보아 진나라 왕을 찔러 죽여야 할 것이오. 진나라 장수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밖에 나가 있는 이때, 안에서 변란이 일어난다면 군신들은 서로 의심하게 될 것이오. 그 틈을 타 제후국들이 서로 연합한다면 진나라를 틀림없이 깨뜨릴 수 있을 것이오. 이것은 내가 가장 바라는 바이지만 그러나 이 일을 누구에게 맡기면 좋을지 모르겠소. 형경께서는 이 점을 생각해 보시기 바라오.“
한참 후에 형가가 말했다.
“이 일은 국가의 대사입니다. 저는 어리석고 부족하여 사명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태자가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양하지 말 것을 간절히 청하자 형가는 마침내 수락했다. 태자는 그를 상경으로 삼고 좋은 관사에 머물도록 했다. 태자는 매을 그를 방문했고, 소·양·돼지로 만든 음식을 대접했다. 또한 형가가 원하는 대로 보물과 수레, 미녀를 바쳐 그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러나 시일이 오래 되었는데도 형가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나라 장수 왕전은 조나라를 쳐 왕을 사로잡고 그 땅을 모조리 차지했다. 진나라 군대는 다시 북쪽으로 계속 진격ㅎ여 연나라 남쪽 변경에까지 이르렀다. 태자 단은 업을 먹고 형가에게 말했다.
“진나라 군대가 조만간 역수를 건너오면 그대를 오래 모시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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