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수 · 채택 열전(1)
범수(范睢)는 위나라 사람으로 자는 숙(叔)이다. 그는 제후들에게 유세하여 위나라 왕을 섬기고자 했으나 가난하여 생계를 이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 위나라 중대부인 수가를 섬겼다. 범수는 수가가 위나라 소왕의 명을 받고 제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함께 따라갔다. 수가는 제나라에 몇 달 동안 머물렀지만 이렇다할 소득을 얻지 못했다.
제나라 양왕은 범수가 변설에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을 보내 금 열 근과 소고기와 술을 하사했다. 범수는 사양하면서 감히 받으려 하지 않았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수가는 크게 화를 냈다. 범수가 위나라의 비밀을 제나라에 알렸기 때문에 이 같은 선물을 받게 된 것이라 여기고, 범수에게 소고기와 술은 받되 금은 돌려보내라고 했다.
귀국한 후에도 수가는 마음속으로 범수에 대한 노기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이 일을 재상에게 보고했다. 당시 재상은 위나라 공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위제였다. 위제는 수가의 말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해 가신에게 명하기를 범수를 태형에 처하게 했다. 호되게 매를 맞은 범수는 늑골이 부러지고 이빨이 빠졌다. 그가 죽은 체하고 움직이지 않자 하인들이 그의 몸을 삿자리에 싸서 변소에 버렸다. 술에 취한 빈객들이 범수의 몸에 오줌을 누었다. 이는 그에게 모욕을 줌으로써 나라의 비밀을 누설하는 자가 다시 나타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한 것이었다. 범수는 삿자리에 싸인 채 간수에게 말하기를,
“나를 당신이 구해주면 후한 사례를 하겠소.”
하고 말하자 간수는 위제에게 가서 삿자리 속의 시체를 갖다 버리겠다고 말했다. 술에 취한 위제는 그렇게 하라고 했고 범수는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다.
그후 위제는 범수를 놓친 것을 후회하고 그를 찾아 나섰는데, 위나라 사람 정안평은 위제가 범수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범수와 함께 달아나 숨어버렸다. 이때부터 범수는 자신의 이름을 장록이라 고쳤다.
이때 진나라 소왕은 알자(謁者왕의 명을 전달하는 관리)인 왕계를 위나라 사신으로 보냈는데, 정안평은 신분을 속이고 왕계의 하인이 되었다. 어느 날 왕계가 정안평에게 물었다.
“저희 동네에 장록이란 분이 있습니다. 상공을 만나 천하 대사를 의논하고 싶어하는데 원수에게 쫓기다보니 낮에는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밤중에 데려오도록 하라.”
정안평은 장록을 데리고 밤중에 왕계를 만났다. 얼마 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본 왕계는 범수의 현명함을 확인하고 이렇게 말했다.
“선생은 삼정 남쪽에서 나를 기다려 주시오.”
왕계는 범수와 비밀리에 약속을 한 후 헤어졌다. 그는 위나라를 떠날 때 범수를 수레에 태워 함께 진나라로 들어갔다. 그들이 호 땅에 이르렀을 때 서쪽에서 마차와 기마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범수가 왕계에게 물었다.
“저쪽에서 오는 자가 누구입니까?”
“동쪽의 현읍을 순찰하러 나온 진나라 재상 양후일 것이오.”
“저는 양후가 진나라의 권력을 독차지하여 열국의 유세객이 입국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도 욕을 볼지 모르니 잠시 수레 안에 숨어 있겠습니다.”
잠시 후 양후가 다가와 수레를 세우고 왕계의 수고를 위로했다.
“함곡관 동쪽에는 무슨 일이 없었는가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대는 제후들의 유세객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겠지. 유세객은 남의 나라를 어지럽히는 아무 쓸모없는 자들이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양후는 그대로 가버렸고 범수가 말했다.
“양후는 지모가 있는 사람이라 들었습니다만 일 처리에는 꼼꼼하지 못하군요. 수레 안에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을 의심하면서도 뒤져 보지 않으니 말입니다.”
범수는 수레에서 내려 달아나면서 말했다.
“그는 반드시 후회하고 수레를 뒤지러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왕계의 수레가 십여 리쯤 갔을 때 과연 한 기마병이 와서 수레를 뒤졌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자 그냥 돌아갔다. 이윽고 범수를 데리고 함양으로 돌아온 왕계는 왕에게 사신으로 다녀온 일을 보고한 뒤 이렇게 말했다.
“위나라에 장록이란 자가 있는데 천하의 변설가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나라는 쌓아 놓은 달걀보다도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저를 쓰면 무사할 것입니다. 글로는 제 뜻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은 그를 수레에 태워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왕은 범수에게 거처만을 마련해 주라 하고 형편없는 음식으로 대접했다. 범수는 그렇게 1년 남짓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당시 소왕은 즉위한 지 36년이 되었다. 그동안 남으로는 초나라의 도읍을 쳐서 함락했다. 초나라 희왕은 진나라에 억류된 채로 죽었다. 또한 동쪽으로는 제나라 민왕을 쳤다. 제나라 왕은 한때 스스로 제(帝)라 칭했으나 소왕이 제나라를 친 뒤로는 쓰지 않았다. 진나라는 삼진에게 여러 번 시달린 탓에 그곳 출신의 유세객들을 싫어하고 믿지 않았다.
제후의 인재는 천하에서 찾는다
양후와 화양군은 소왕의 어머니인 선태후의 동생이며 경양군과 고릉군은 모두 선태후의 아들로 소왕의 동생이다. 양후가 재상으로 있을 때 다른 세 사람는 번갈아가며 장군에 올라 많은 영지를 소유했으며, 태후와의 관계로 인해 그들 개인의 재산은 왕실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 무렵 양후는 장군이 되어 위나라와 한나라 땅을 넘어 제나라 장수를 쳐서 자신의 영지인 도 땅을 넓히려고 했다. 그러자 범수가 글을 올렸다.
「저는 ‘현명한 군주는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벼슬을 준다. 노고가 큰 자는 봉록이 많고, 공이 많은 자는 작위가 높으며, 백성을 잘 다스리는 자는 벼슬이 높다. 그러므로 무능한 자는 관직에 앉는 일이 없고, 유능한 자는 그 재능을 감출 수 없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제 말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그렇게 실행하시고, 옳지 않다고 여기시면 저를 오래 머물게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용렬한 군주는 자신이 좋아하는 자에게 상을 주고 미워하는 자에게 벌을 주지만, 현명한 군주는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고 죄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내린다’고 했습니다. 지금 제 가슴은 매질을 당할 만한 가치도 없으며, 혀라는 도끼를 맞을 자격도 없는 천한 몸이지만 어찌 감히 확신도 없는 일을 말하여 대왕을 시험하겠습니까? 대왕께서 저를 천하다 하여 가벼이 여기실지라도 어찌 왕계마저 대왕께 믿음 없이 저를 천거했겠습니까?
저는 ‘내부의 집을 부유하게 하는 자는 나라에서 찾고, 제후의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자는 천하에서 찾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천하에 현명한 군주가 있으면 제후는 뜻대로 인재를 활용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군주가 인재를 얻어 가기 때문입니다. 명의는 환자의 생사를 알고 장군은 일의 성패에 밝습니다. 성공할 것 같으면 행하고, 실패할 것 같으면 행하지 않으며, 의심스러우면 먼저 시험해 봅니다. 이 방법은 아마 순 임금이나 우 임금이 다시 나타나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 속 지극한 말은 글로 다 옮기지 못하고 척박한 말은 대왕께서 들으실 가치가 없습니다. 대왕께서 그동안 저를 내버려 두신 것은 제가 아둔하여 대왕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라건대 틈을 내시어 제가 알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만약 제가 올리는 말씀에 한마디라도 쓸모없는 것이 있다면 무거운 형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진나라 소왕은 범수의 글을 읽고 대단히 기뻐하며 왕계에게 사과하고 수레를 보내 범수를 데려오도록 했다. 범수는 비로소 왕이 임시로 머무는 거처인 이궁에서 왕을 알현하게 되었다. 그때 범수는 짐짓 모른 체 하며 곧장 후궁들이나 드나드는 영항(永巷)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왕이 도착하자 환관이 노하여 범수를 내쫓으며 말했다.
“대왕께서 납신다.”
범수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진나라에 어디 왕이 있단 말인가? 태후와 양후만 있을 뿐이오.”
이렇게 하여 범수는 소왕을 자극하려 했다. 왕이 그들이 다투는 말을 듣고 범수를 궁으로 청해 들었다.
“과인은 일찍부터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으나 마침 의거의 일이 화급하여 조석으로 태후와 의논했소. 이제는 의거와의 문제도 해결되어 선생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소. 과인이 우둔했음을 민망하게 생각하오. 삼가 손님과 주인의 예로 말씀해 주기 바라오.”
그러자 범수가 사양했다. 그날 범수의 알현을 지켜본 신하들은 모두 낯빛이 변하여 자세를 바로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진나라 왕이 주위를 물리치자 궁에는 아무도 없었다. 왕은 범수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
“선생은 과인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겠소?”
“글쎄요, 글쎄요.”
범수는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렇게 세 번을 반복하자 왕은 무릎을 꿇은 채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서는 정녕 과인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을 생각이오?”
범수는 그제야 말했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옛날 여상이 주나라 문왕을 만났을 때 그는 위수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때까지 두 사람 사이가 멀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나 문왕이 그와 한번 얘기를 나눈 뒤로는 그를 태상공으로 삼아 함께 수레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이는 여상이 한 말의 깊이를 가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문왕은 여상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천하의 왕이 되었습니다. 만약 문왕이 여상을 멀리하고 그의 고견을 듣지 않았더라면 주나라는 천자의 덕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고 문왕과 무왕도 왕업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타국에서 온 나그네로서 지금 대왕과는 서먹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대왕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두 대왕의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것뿐이며 또한 대왕의 혈육에 관한 일입니다. 어리석게도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오나 대왕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나이다. 대왕께서 세 번이나 하문하셨음에도 대답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지 결코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저는 오늘 대왕께 말씀드리고 내일 주살당한다 해도 감히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은 사람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니 진나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오직 두려운 것은 선비들이 제자 충성을 다하고도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고 발을 싸맨 채 감히 진나라로 오려 하지 않을까 하는 것뿐입니다.
대왕께서 위로는 태후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간신들의 아첨에 미혹되어 궁궐 깊숙한 곳에만 계시면서 시종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간악한 신하를 가려내지 못하신다면 크게는 종묘를 뒤집어엎게 되고 작게는 대왕의 몸이 고립되어 위태롭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두려울 뿐 제 자신이 온갖 곤욕과 죽임을 당하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죽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만 한다면 저의 죽음은 사는 것 보다 오히려 낫다고 할 것입니다.“
진나라 왕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오? 대저 진나라는 멀리 벽지에 있고 과인은 아둔하고 불초한데 다행히도 선생께서 갖은 곤욕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오셨소. 이는 하늘이 과인에게 선생을 보내 주신 것이니 선왕의 종묘를 이어갈 수 있게 한 것이오. 과인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은 하늘이 선왕을 어여삐 여기시어 이 외로운 자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런데 선생께서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크고 작고를 가리지 말고 위로는 태후와 관계되고 아래로는 대신과 관계되는 모든 일을 과인에게 가르쳐 주시오. 과인을 의심하지 말아 주시오.”
범수가 절을 하자 진나라 왕도 절을 했다. 범수가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견고한 요새로사 북쪽으로는 감천산과 곡구가 있고, 남쪽으로는 경수와 위도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농과 촉이 있고, 동쪽으로는 함곡관과 상판의 험한 고개가 있습니다. 또한 정병 백만에 전차 천 대가 있어 유리할 것 같으면 들어와 지키면 됩니다. 이는 왕업을 성취하는데 유리한 형세입니다. 백성들은 사사로운 싸움에는 겁이 많지만 나라를 위한 일에는 용감하니 이 또한 왕업을 이루는 토대입니다. 대왕께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갖고 계십니다. 진나라는 용감한 군사와 수많은 수레를 갖고 있어 제후들을 평정하는 것은 마치 한로를 풀어 절름발이 토끼를 덮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패왕의 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왕의 뭇 신하들 중에는 이 일을 감당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15년 동안이나 함곡관을 닫아걸고 군사를 일으켜 산동을 엿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양후의 계략이 성실하지 못하고 대왕의 계략에도 과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나라 왕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과인의 과오가 무엇인지 말해 주시오.”
범수는 좌우에 비밀을 엿듣는 자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 안의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나라 밖의 일에 대해서만 말하여 진나라 왕의 마음을 살피려 했다. 범수가 말했다.
“양후가 한나라와 위나라 땅을 넘어 제나라의 강수를 치려고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진나라에서 병력을 작게 보내면 제나라의 병력을 물리칠 수가 없고, 많이 보내면 진나라의 국력에 손실이 생깁니다. 대왕의 계략은 진나라의 군사를 최소한으로 동원하면서 모자라는 부분은 한나라와 위나라의 병력으로 채우는 것인데, 이는 도의에 어긋납니다. 지금 동맹국인 제나라와 친하지 않는다 해서 남의 나라를 지나가면서까지 치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계책치고는 허점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대왕께서는 먼 나라와 국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하면 한 치의 땅을 얻어도 그대로 대왕의 것이 되고, 한 자의 땅을 얻어도 온전히 대왕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을 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지금 한나라와 위나라는 중원에 자리 잡고 있어 천하의 중추가 됩니다. 대왕께서 만약 천하의 패자가 되시려거든 이 중원의 세 나라, 즉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를 가까이하여 이곳을 천하의 중심으로 삼으십시오. 그런 뒤 이곳을 발판으로 초나라와 조나라를 위협하십시오.”
진나라 왕인 소왕이 말했다.
“과인은 일찍부터 위나라와 친교를 맺으려고 했소, 그러나 위나라는 변덕스러워서 아무리해도 가까이할 수가 없었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대왕께서는 겸손하게 대하시면서 예물을 보내 가까이 하도록 하십시오. 그래도 안 되면 땅을 뇌물로 주시고, 그래도 안 되면 군사를 일으켜 치십시오.”
“과인은 선생의 말에 따르겠소.”
이로써 소왕은 범수를 객경으로 삼고 그와 군사에 관한 문제를 상의했다. 소왕은 범수를 계략에 따라 오대부인 관을 보내 위나라를 치게 하고 희 땅을 빼앗았다. 2년 후에는 다시 형구를 공략했다. 범수가 소왕에게 말했다.
“진나라와 한나라의 지형은 마치 수를 놓은 것처럼 얽혀 있어 진나라에게 한나라는 마치 나무에 붙은 좀벌레와고 같고 사람의 내장에 생긴 병과도 같습니다. 천하가 무사하면 괜찮지만 진나라에 화근이 될 나라로 한나라보다 더한 나라는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먼저 한나라를 회유하십시오.”
“과인은 일찍이 한나라를 회유하려 했소.. 그러나 만일 한나라가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한나라가 어찌 대왕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 형양을 치시면 공읍과 성고의 길이 막히게 되고, 북쪽 태행의 길을 차단하면 상당의 군사는 내려올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 군사를 일으켜 형양을 친다면 한나라는 셋으로 갈라집니다. 결국 한나라는 망하게 될 터인데 어찌 대왕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만약 한나라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패업의 일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좋소.”
소왕은 이렇게 대답하고 곧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려고 했다.
열매가 너무 많으면 가지가 부러진다
범수는 소왕과 점점 가까워져서 때때로 진언도 했는데, 수년 동안 그의 의견이 모두 반영됐다. 범수는 기회를 보아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이 산동에 있을 때 제나라에는 전문이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왕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진나라에는 태후·양후·화양군·고릉군·경양군이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대왕이 계신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무릇 왕이란 나라의 권력을 쥐고 있고, 사람들에게 이익과 해를 줄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를 일컫습니다. 그런데 태후는 지금 대왕을 돌아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고, 양후는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도 대왕께 보고하지 않으며, 화양군과 경양군은 마음대로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고릉군은 대왕께 보고도 하지 않고 인사를 마음대로 합니다. 이렇듯 나라에 귀인이 네 명이나 있으면 나라가 위태롭지 않을 리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이들 네 귀인 아래에 계시니 실상은 대왕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니 대왕의 권력이 어찌 기울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명령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나라 안에서는 위엄을 세우고, 나라 밖에서는 권력을 무겁게 한다’란 말을 들었습니다. 양후는 대왕의 이름으로 제후들을 제압하고, 천하의 땅을 나누어 봉하며, 적을 징벌하여 나라를 빼앗는 등 제멋대로 처리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싸움에서 이겨 한 지방을 빼앗으면 이익은 자신의 봉읍인 도 땅의 것으로 하고 손해는 제후들에게 뒤집어씌우며, 싸워서 패하면 백성을 원망하고 화는 나라에 돌립니다.
옛말에도 ‘나무에 열매가 지나치게 열면 가지가 부러지고 가지가 부러지면 나무를 헤친다. 너무 큰 봉토를 가진 자는 나라에 위태롭고 높이 오르는 신하는 군왕을 얕잡아본다’고 했습니다. 지금 진나라에서는 지방 관리에서부터 내시와 모든 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재상 양후의 사람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저는 대왕께서 조정에서 고립된 것을 보고 만세 후에 진나라를 이어갈 분이 대왕의 자손이 아닐까 봐 은근히 근심하는 바입니다.“
소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말했다.
“과연 옳은 말이오.”
이에 소왕은 태후를 폐위하고 양후·고릉군·화양군·경양군을 함곡관 밖으로 추방했으며, 범수를 승상으로 삼았다. 왕은 양후에게서 재상의 봉인을 거둔 뒤 그를 도 땅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때 지방 현관에게 명하여 수레와 소를 마련하게 했는데, 무려 천여 대에 이르렀다. 양후 일행이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함곡관 관리가 조사해 보니 보물과 진품이 왕실을 능가할 정도로 많았다. 진나라는 범수를 응 땅에 봉하여 응후라고 불렀다. 진나라 소왕 41년의 일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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