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송하훈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군사들을 모으며 진도로 가려고 했을 때 서울에서 달려온 선전관 양호로부터 임금 선조의 교서를 받았다.
임금은 이르노라. 나라가 의지하고 보장으로 삼는 것은 오직 수군이었는데도 하늘이 우리에게 화를 내린 것을 아직 후회하지 않으니 흉측한 칼날은 마침내 3도의 대군이 한 번 싸움에 궤멸하였도다. 그대의 지위를 바꾸어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오늘 이와 같이 패전의 욕됨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제 경을 평민의 신분에서 발탁하여 충청·전라·경상 등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하는 바이니 부임 즉시 장병들을 불러 위로하고 흩어진 군사를 찾아 진영을 차리도록 하라. 수사(水使) 이하를 모두 통솔하되 때에 따라 군율을 어기는 자에게는 군법으로 처단하라.
그러나 막상 임금 선조의 교지를 받아든 이순신의 심정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백의종군이란 신분에서 벗어나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것은 이순신의 명예 또한 회복되는 것과 마찬가지겠으나 당장 기가 막힐 일이었다. 말이 좋아서 삼도수군통제사이지 군관을 비롯한 약간의 군사로 어떻게 싸우라는 것인지 가슴이 답답할 일이었다.
절체절명.
그러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임금 선조의 교지를 움켜쥐고 계속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이순신의 첫 작품은 노량진에 있는 배설이 갖고 있는 12척의 함선을 가까이 두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칠천량 해전에서 쑥대밭이 되어버린 조선수군으로 인해 왜적의 수군은 승승장구 남해도와 순천부를 차례로 함락하고 두치진에 이르러 상륙하는 참이었다.
“당장 배설에게 12척의 함대를 전라도 장흥으로 이끌고 오도록 하라.”
이순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절체부심하고 있을 무렵, 남원성에서 급히 전갈이 왔다. 경주에서 왜적의 동태를 살펴보던 도제찰사 이원익은 왜적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충청, 전라, 경상,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청야령(淸野令)을 내린 것이었다. 이순신에게도 급보가 날아들었는데, 한 가지씩 뛰어난 재능이 있는 중간간부급은 급히 남원으로 달려와 왜적을 막아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순신이 황대중에게 말했다.
“진주싸움에서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나온 황공이 이번 남원성 싸움에서 수고를 해주어야갰소.”
어느 틈에 이순신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황대중은 특별히 뽑힌 별초군(別抄軍)이 된 것이었다.
“당연히 가야지요. 여기서 죽으나 남원에서 죽으나 나라를 위해서 죽는 일이라면 장소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다만 장군과 함께 싸우다 죽는 것이 제 소원이었는데 그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부디 목숨을 꼭 부지하시오.”
“장군께서도 무사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황대중은 부랴부랴 남원성을 향해 달렸다. 한편 백성들은 행여 왜적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곡식이며 가축들을 모두 산성으로 몰아넣었다. 쌀 한 톨이라도 왜적에게 이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우키타 히데이에가 지휘하는 왜적의 숫자는 5만여 명에 이르고 있었고, 수군 또한 7천여 명이 섬진강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왜적들은 섬진강을 따라 곡성을 거쳐 남원을 칠 계획이었다. 왜적에 비해 조선의 군대는 형편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수군이 궤멸돼 버린 상태였고 왜적들은 산 호랑이처럼 기세가 등등했다. 기껏 영·호남 합쳐봐야 1만1천5백 명 정도였으니 조선군과 명군이 모두 합쳐도 3만이 넘지 못하는 반면, 왜적의 숫자는 모두 14만 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전라병사의 위치는 강진 병영이었다. 수인산에 산성이 있는 전라병사는 천혜의 요새였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흥으로 옮긴 터였다. 전라병사 이복남은 원균이 수군통제사로 자리를 옮겼을 때 전라병사가 된 인물이었는데,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들어 급히 순천으로 달려갔으나 왜적은 사천에 상륙, 남원으로 진격해 왔다. 그래서 이복남은 급히 절반의 군사인 7백여 명을 끌고 남원성으로 들어왔다.
남원성에는 명나라 3천여명의 기병이 있었으므로 조선군과 합쳐 도합 4천명 뿐이었다. 왜적의 본대가 남원에 나타난 것은 8월 13일이었는데, 그들은 13일 나타나더니 하루 종일 조총을 쏘아대거나 미처 피난가지 못한 사람들을 잡아내는가 하면 집이라고 생긴 것은 모두 불을 질러댔다. 그래서 남원은 자욱한 연기로 가득차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적은 빈약한 조선군에 비해 5만명이나 되는 대규모 군사인데도 의외로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첫날엔 선봉 100여 명만 동원되어 조총을 쏘아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남원성에서도 선봉대를 향해 포로 응사했지만 왜적의 총탄 역시 성 안으로 날아들었는데,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왜적은 삼삼오오 흩어져 야트막한 언덕에 기대고 조총을 쏘기 시작했다. 성 안의 조명 연합군은 본진을 향해 포를 쏘아댔으나 거리가 멀어 닿지 않은 대신 조총의 탄환은 적중률이 높았다. 포는 가까이도 멀리도 가지 못했지만 성 가까이 접근해 쏘아대는 조총은 많은 사상자를 내게 만들었다.
다음 날인 14일, 조명연합군은 과감한 선제공격을 개시했다. 1천여 명의 군사들이 우뢰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다가오는 왜적에게 돌격했지만 빗발치는 조총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후퇴를 했다. 선제공격이 실패로 끝나자 왜적의 역공이 거세어지면서 남원성을 에워싸고 포와 조총으로 공격을 해왔다. 둘레가 8천2백 척의 석성인 남원성은 그야말로 왜적으로 빈틈없이 에워싼 왜적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적은 마치 달무리가 달을 에워싸고 있는 듯 남원성을 포위하고 있어 위급하기 이를 데 없구나. 포성은 하늘을 진동하고 불빛은 대낮인데 낮과 밤이 같구나. 짐승같이 날뛰는 왜적을 막아 싸우는 우리 군사들의 모습에 어찌 가슴이 메어지고 눈물과 탄식이 터져 나오지 않으리.
산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조경남은 왜적이 남원성을 에워싼 모습을 보고 이같이 적었다.
남원성은 이제 운명의 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조경남의 말대로 달무리가 달을 에워싸듯 왜적이 좁혀오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남원성은 이미 많은 부상자들과 사망한 자들로 인해 음산한 분위기였다. 그런 가운데 왜적은 남원성의 참호를 잡초와 벼로 다발을 만들어 메우기 시작했다. 기필코 남원성을 무너뜨리겠다는 의지를 보는 순간, 그러잖아도 많은 왜적의 수에 기가 질린 군사들이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구원병이었지만 애타게 기다리는 구원병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전주성에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감감소식이었다. 15일은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바람에 왜적은 공격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다음 날인 16일 밤에는 비가 걷히자 왜적의 야간공격이 감행되었다. 밤 8시경, 왜적은 사방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포를 날리기 시작했다. 우세한 화력 앞에 조선군의 대응은 약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문은 의외로 잘 싸우고 있었다. 북문을 지키는 이복남이었다. 그는 왜적의 조총을 대항하기 위해 활과 소총을 접목시켜 만든 무기로 왜적을 놀라게 했다. 왜적이 안심하고 접근해 올 때 갑자기 일제사격을 퍼붓거나 돌과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황대중은 이런 이복남과 명나라 장수 양원 사이에서 거느리는 군사들도 없이 외롭게 싸웠다. 오직 황대중의 머릿속에는 왜적을 물리치는 일념 그것뿐이었다. 이 때 북문을 공격한 시마즈 요시히는 휘하 1만 명의 군사로 덤벼들었지만 이복남은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남원성 높이까지 쌓아올린 풀 다발을 타고 왜적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자 도명연합군은 드디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난 파도 앞에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던 조명연합군은 동문을 지키던 이신방이 전사했다.
“황공! 우리는 여기서 영광스럽게 죽는 것이요.”
전라병사 이복남이 황대중의 팔을 잡으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알겠습니다. 장군.”
황대중은 이복남과 함께 백병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양원이 50여기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는 다짜고짜 싸울 만큼 싸웠다며 몸을 피하자고 말했다. 그동안 겉으로는 큰소리를 치면서도 막상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살 궁리부터 하고 있었다. 남의 나라인 조선에 와서 싸우는 그가 이 만큼이라도 해 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우리는 여기에 남을 테니 먼저 가십시오.”
황대중이 손을 들어 어서 가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복남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왜적을 향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을 때 황대중은 말에서 내린 다음 북문누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북쪽을 향해 큰 절을 네 번 올리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곳 남원은 제 무덤을 만들 곳 입니다. 이제 죽음을 맞이할 시각입니다. 하늘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이번엔 서쪽인 풍산(楓山)을 향해 두 번 절을 올렸다. 풍산은 강진 작천을 가리키는 지역으로 조상의 선산이 있는 곳이었다.
“아! 이젠 나도 가련다!”
황대중이 가만히 주저앉자마자 가까이 다가온 왜적이 섬광처럼 칼을 휘둘렀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조총을 쏘아대니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황대중은 전멸한 조선군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명나라 군사도 3천1백 17명 중 살아남은 자가 불과 1백 17명에 불과했다.
왜적의 장수가 황대중의 옷을 뒤적이더니 호패를 찾아낸 다음 그 자리에서 비단 3필을 찢어 글씨를 써내려갔다.
조선(朝鮮)의 충신(忠信) 황대중(黃大中).
그 글씨는 황대중이 쓰러져 있는 시신 곁에 세웠다. 왜적의 장수가 깃발을 세우고 나서 통사왜관을 시켜 큰소리로 말하게 했다.
“조선의 백성들아! 너희들은 조선의 충신 황대중이 죽은 줄을 모르느냐!” 하고 외치자 주부 김완이 축천정(丑川亭) 나무 숲 언덕 밑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왜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려 황대중 곁으로 다가갔다. 황대중은 피를 사뭇 쏟아내면서도 가까스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장군! 저 김완입니다!”
김대중이 눈썹으로 알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마지막 힘을 다해 한 음절씩 끊어서 말했다.
“나의 시체를 거두어서 내 말에 실려 내 집에 보내다오.”
“알겠습니다, 장군!”
그 말을 마치자마자 황대중은 마침내 눈을 감았다. 황대중을 태운 말은 아무런 길잡이 없어도 홀로 하루 300리를 달려 강진의 작천까지 쉬지 않고 내려갔다. 주부 김완 역시 말을 뒤따라 작천까지 내려와 호상(護喪)이 되어 장례식을 준비했다.
그런데 황대중의 시신을 가지고 온 신마(神馬)가 전혀 여물이며 물을 거절했다. 결국 신마가 죽고나자 자손들은 신마의 무덤을 만들어주었는데 현재도 작천에 말 무덤이 있는 것도 그 연유에서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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