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이 비록 수백 년 전 조선이고, 한산(閑山)이 비록 수백 년 된 한산인가? 너희들이 내게 어찌할 것인가?”
왜적 서너 사람이 이렇게 외치더니 차츰 다가왔다. 이순신은 무서워서 피하는 척 하며 물러나자 왜적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왜적의 우두머리는 황금색 투구와 붉은 갑옷을 입고 있어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이 때 이억기가 화포를 쏘아댔다. 갑작스런 조선군의 반격에 왜적은 몹시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화포를 맞은 배는 더 이상 이쪽으로 오지 못했고 불에 타올랐다. 황대중이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유엽전(柳葉箭)으로 왜적의 장수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피웅!”
시위를 떠난 유엽전은 여지없이 왜적 장수의 목에 꽂혔다. 왜적 장수는 목에서 피를 뿜으며 고꾸라졌는데, 잠깐 두 팔을 허공에 허우적대는 것 같더니 바닷물로 풍덩 떨어지고 말았다. 조선수군들이 일제히 왜적의 배 가까이 다가가 사로잡거나 죽였다.
“황공! 참으로 장하오. 내 몸이 불편해서 직접 전장엘 나가지 못했는데 황공이 큰 공을 세웠구려!”
“장군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살 맛이 납니다.”
“하늘이 황공을 태어나게 했고, 황공은 끝내 왜적의 장수를 쏘아 죽였구려.”
“장군. 지나친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황대중이 손사래를 치며 몸을 숙이자 이순신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황공과 함께 술이나 한 잔 하십시다.”
이순신이 아랫사람을 시켜 술상을 봐오라고 일렀다. 안주는 별 것이 없었지만 왜적을 물리친 승리의 기쁨에 두 사람은 술을 계속 주고받았다. 달이 몹시 밝았다. 하늘엔 뭇별들이 무수히 박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이순신이 눈을 지그시 감고 읊조렸다.
깊은 밤 나라 걱정에 잠 못 이루고 있을 때
夜深愁不寐
머리 위 하늘에 별이 가득하고
頭戴一千高
달 지고 나면 강에서 파도소리 들리고
月落江聲起
용울음에 칼이 빛나는구나.
龍鳴尺寶刀
“장군. 저도 한 수 지어보겠습니다.”
“당연히 그리 하셔야지요.”
이번엔 황대중이 조용히 읊조렸다.
하늘 아래 한 것에
天一方
뛰어난 사람을 보네
望美人
달은 이미 삼경인데
月三更
바다에 배를 띄우네.
汎中流
나라 찾은 조적은 어디 있을까
可憐祖狄今安在
노 젓는 소리만 더욱 슬프네.
擊집聲中萬古愁
두 사람은 밤늦도록까지 술을 마시면서 나라 걱정을 했다. 이날 황대중과 이순신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초개처럼 던질 수 있다는 점에 서로 공감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와 함께 잔인한 복수를 마친 왜적들은 경상도 연안에 12개의 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사실 진주성 싸움에서 왜적들 또한 엄청난 손상을 입은 터였다. 진주성 전투에서 2만 명의 병력을 잃은 왜적은 승리를 했다고는 하지만 진정한 승리가 아니었다. 모든 왜적들이 동원된 전투에서 진주성을 발판으로 호남진출을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질 않았다.
더구나 조선군사들은 전쟁 초기 때와는 딴판으로 달랐다. 도망가는 군대가 아니라 이제는 의병들이 일어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왜적들을 노리고 있었다. 도원수 권율의 지휘하는 가운데 홍개남, 곽재우, 선거이 등이 왜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전라도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왜적들이 경상도 연안에 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한 것은 만일의 경우 바다를 이용하여 일본 본토로 철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명나라까지 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바다 건너 내륙 깊숙이 들어와 야욕을 채우려 했지만 만신창이나 진배없는 꼬락서니였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나라와 왜적이 협상을 하게 되면 전쟁은 끝날 수도 있고 협상이 불발되면 다시 재격돌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3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날이면 날마다 함선을 새로 개조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한산도에서 왜적과 대치하며 지내던 이순신은 조정에서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서를 받았던 거였다.
이순신이 3도수군통제사가 된 것은 원균 때문이었다. 원균과의 불화는 조정에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 장수 모두 수군의 장수로 활용을 하기 위해서는 똑 같은 직책에서 한 사람을 더 올려주면 되는 일이었다. 이순신은 그동안 왜적과 싸운 공이 컸으므로 3도수군통제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대중은 이순신이 함선을 건조하고 지자총통이며 현자총통을 만드는데 적극 도왔다. 황대중이 보는 이순신은 한없이 존경스럽고 정이 가는 장수였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면서 목숨을 바쳐 죽는다 해도 조금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은 장수였다.
그러나 판옥선을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목재가 풍부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판옥선을 만들 수 있었지만 문제는 총통이었다. 특히 지자총통은 한 자루의 무게가 무려 150근이 되었다. 현자총통도 50근이 필요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판옥선은 완공이 되었지만 문제는 무기제조가 뒷받침이 되질 않았다.
이순신은 하는 수 없이 철물을 구하러 다니는 중들에게 권선문을 주면서 마을을 다니게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쇠붙이를 구하려는 고육지책이었지만 이미 백성들의 삶은 곤궁하기가 짝이 없어 쉽게 되질 않았다. 보다 못한 황대중이 이순신에게 한 가지 계책을 말했다.
“장군. 감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황공.”
“지금 장군께서는 철물 때문에 고민이 이만저만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철물의 중량에 따라 상을 주기도 하고 벼슬도 줄 수 있으며 병역까지도 면제해 주는 일 말입니다.”
“조정의 허가가 있어야 될 것이오.”
“그럼 조정의 허가를 받은 후 그렇게 하시지요.”
“좋은 생각이외다.”
이순신은 즉각 파발마를 띄워 이 같은 상황을 알리고 쇠붙이를 낸 사람은 면천(免賤)까지 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그러자 남 몰래 감춰놓은 자들이 나타나 쇠붙이를 바쳤는데, 면천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순신은 가끔 여러 장수들과 회의를 할 때마다 운주당(運籌堂)을 이용하곤 했는데, 황대중의 의견 또한 운주당에서 논의를 해 철물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이순신이 전쟁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던 1594년 2월 21일 구화역 앞바다에 왜적의 배 8척이 줄지어 나타났다. 그런데 다음 날도 왜선 10척이 나타나자 이순신은 직접 출동을 하려고 하자 이미 도망을 간 후였다. 다시 3월 3일 동이 틀 무렵 왜의 대선 10척, 중선 14척, 소선 7척이 나타났다는 급보가 날아왔다. 이순신은 즉시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에게 전령하여 모조리 쳐부술 것을 명했다. 그날 밤 이순신은 어둠을 타고 몰래 항해한 끝에 4일 새벽 전선 20여 척을 견내량에 머물게 한 후 조선수군을 당항포와 오리량 등 왜선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자신은 원균과 이억기를 거느리고 영등포와 장문포 적진 앞 중도 바다 가운데서 학익진을 펼쳐 빠져나갈 수 없도록 했다.
“저기 왜선들이 보입니다.”
황대중의 말에 이순신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왜선 10척이 진해 선창에서 슬금슬금 나오더니 기슭을 끼고 달아났다. 조방장 이영담이 돌진해 나가자 10척에 탄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모조리 산으로 올라갔다. 5일 새벽에도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넓은 바다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이영담이 당항포 포구 안으로 쳐들어가 21척의 왜선을 불살랐다.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승리를 했는데도 이순신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원균 때문이었다. 그는 이순신의 명을 따랐지만 보고서를 작성할 때 왜선 31척을 모두 자신의 군사가 불태운 것처럼 공문을 보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원균이 11척의 왜선을 격파한 것은 사실일지라도 31척 모두 불태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어서 이순신의 분노를 사기에 마땅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명나라 선유도사부 담종인은 이순신에게 왜적을 무찌르지 말라는 패문(牌文)을 보내왔다. 명나라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는 직책이었으므로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담종인이 왜적과 협상을 위해 왜적 진영에 있을 때 이순신이 왜적의 배를 격퇴했다는 씰은 협상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다. 명나라의 말이라면 임금 선조도 머리를 조아리는 판에 이순신은 오히려 담종인에게 항의했다. 몸이 몹시 불편한데도 직접 초를 잡고 써내려갔다.
--패문에서 말씀 하시기를 ‘왜적이 무기를 거두고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다들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으니 조선수군도 병선을 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일본 군사들의 진영에 가까이해서 혼란을 야기하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현재 왜적들은 거제·김해·동래 등지에 진을 치고 있는 바, 모두 다 우리 땅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하지 말라니 이 무슨 말씀입니까? ······· 특히 왜적들은 살인하고 약탈하기를 배나 더 하고 있는데 무기를 거두어 돌아갈 생각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이순신은 직접 초를 잡기까지 하면서 항의한 것은 그만큼 왜적을 무찔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왜적과의 대치 정국을 풀기 위해서는 육군과 수군이 함께 참여하는 ‘수륙합동작전’을 조정에 여러 번 간청했다. 그러나 조정은 이순신의 요청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성을 의지해 싸우는 육군이 거꾸로 성내에 있는 왜적을 공격한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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