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28
흉유성죽(胸有成竹)
김현임 (수필가)
유월의 빗소리는 대지의 목으로 젖 넘기는 소리다. 노란 부리의 어린 새가 어미가 건네는 먹이를 냉큼냉큼 받아먹듯 지상의 온갖 것들이 단비로 마른 입을 욕심껏 축이는 이맘 때, 지상의 그 무엇보다 통통히 살 오르는 것이 죽순이다. 혹자는 유월을 일러 ‘장미의 계절’이라했다. 도처에 만개한 여름 입구의 장미도 눈부시게 좋다. 그뿐인가. 가지 휘늘어지게 달린 보리수, 알알이 영글어 홍옥 빛깔 자태를 뽐내는 앵두도 싱그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울울창창한 대 사이를 헤매며 죽순을 꺾는 맛이야말로 초여름 입구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아닐까. 이제 막 대지를 뚫고 올라온 새순의 야물 차고 청신한 체취를 맡으며 흘리는 땀방울! 대자연이 펼쳐놓은 힐링 캠프이자 천연헬스장에서 삼림욕을 즐기며 얻는 심신 치유와 다이어트 효과는 넘치는 보너스다.
평생 처음 죽순을 따본다는 양치기 씨는 그 새의 이름을 바보새라 명명했다. ‘허허허허’, 참으로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할 때 터트리는 허망한 웃음소리의 새는 대숲을 슬슬 기어 다니는 우리 꼴이 우스꽝스러운지 쉼 없이 헛웃음을 날린다. 바보새 뿐이랴. 이 후덥지근한 곳에 언제 다시 들어올까 핑계 대며 채 여물지 못한 어린 것까지 두리번대는 우리를 나무라는 시어미새도 등장했다. ‘카악 !’ 하는 새소리가 ‘뭐야? 니들 당장 그만 두고 여기서 썩 나가지 못해’하고 윽박지르는 소리로 들린다는 양치기 씨다. 최근 3cm 크기의 등검은말벌의 출현으로 비상이 걸렸단다. 불행히 벌과 만났을 때, 절대로 벌에게 덤빌 생각을 하지 말고 되도록 낮은 자세를 취하거나 바짝 엎드리는 게 상책이라던가. 맞다. 대자연 속에서 사람은 그리 잘난 존재가 아니다. 몰염치의 도적에 불과한 우리는 슬금슬금 최대한의 조심성으로 터 주인들의 눈치를 살핀다. 누구의 화장구(化粧具)이련가. 연분홍 분솔 천 개 만 개 매달아놓은 자귀나무 아래에선 말벌영감님이 웽웽거리며 감시 중이다. 풋풋한 상추밭 고랑에선 빨갛게 단장한 매서운 눈초리의 지네아줌마가 잽싼 발걸음으로 텃세를 하니 대숲에 둥지 튼 새 무리들의 일갈은 당연하다.
대숲 골짜기에 흰 구름 피어오르고
구름 속에선 옥소리가 무리져 들려 온다
부생우득반일한(浮生遇得半日閒), 뜬 구름 같은 인생길에서 만나는 반나절의 한가함이라, 우연히 불어오는 삽상한 바람 한 줄기다. 강 건너 온 바람에 땀을 식히며 열 두 폭 병풍에 곁들인 짧은 시구 속 유월의 정경을 만끽함도 대숲에서 누리는 여유다.
최적(最適)의 수확기를 놓치면 내 광주리에 넣을 수 없는 것이 한 둘이랴. 눈에 보이지 않는 학문이나 명예, 사랑, 우정도 그렇지만 잠시잠깐 우리 곁에 머물다 시들어지는 먹거리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특히 죽순이 그렇다. 소나기라는 성능 우수한 신장촉진제(身長促進劑)는 새로 나온 대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단숨에 한 자 넘게 키를 늘여놓기 일쑤이니 대를 일러 승모초(勝母草)라 하지 않던가. 나른한 봄의 끄트머리, 여름을 재촉하는 뻐꾸기가 게으른 템포로 엇박자의 노래를 부를 때, 저 멀리 보리이삭 타는 고소한 냄새가 드넓은 들판을 한 자락 안개처럼,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 어디선가 모내기꾼들의 농요(農謠) 한 가락이 들려올 듯 마냥 분주한 농번기 때, 하루라는 문장의 쉼표인양 한 차례 쏟아지는 비다. 높아진 습도에 제 철 만난 모기떼 녀석들의 극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바로 이때가 죽순 채취의 적기다.
고산 윤선도는 오우가(五友歌)에서 네 번째 벗으로 대나무를 읊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내 어찌 고산(孤山)선생처럼 대나무에게 벗의 칭호를 붙이랴.
흉유성죽(胸有成竹), 대를 그리고자 할 때, 이미 그리는 이의 마음엔 이미 대가 완성돼 그려져 있다는 말로 매사에 착수하기 전에 이미 그 일에 대한 충분한 복안이 서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오지의 바위 꼭대기에서 석청을 따는 원시부족들은 생산자인 벌들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꿀 채취 작업에 나서기 전, 아니 귀한 물품을 거저 얻기 전에 치르는 진심어린 목례였다. 죽순을 꺾으며 종종 절감한다. 타인으로부터 무언가 하나를 얻으면 나 또한 상대를 위해 어김없이 하나를 건네는 ‘Give and take’의 자세를, 더 나아가 상부상조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자연이란 거대한 무리에 속한 한 생명으로서 산천초목은 물론이요, 바위 틈바구니에 낀 이끼에 이르기까지 주변 만물과 조화로운 모듬살이의 얼개가 그려진 그림을, 그들과 어울려 사는 내 위치의 전면도(全面圖)를 꺼내어 감히 흉내 내보는 옛 사람의 선경지명, 흉유성죽의 경지다.
긴 강물에서 노니는 저 바람과 달은 누구의 소관이던가?(長江風月誰人官). 두 발 쭉 뻗고 대줄기에 등을 기대고 앉아 대상없는 반문도 한다.
우물 파 물 마시고
밭 갈아 농사 지어 먹으니
제왕의 힘인들 내게 무슨 소용인가.
순 임금이 민정을 시찰하다 만난 노인이 발로 땅을 두드리며 장단 맞춰 불렀다는 격양가(擊壤歌)도 읊조린다. 오로지 자신만을 기다려준 고향의 눈 맑은 처녀, 그녀를 만난 사내의 심정이 그럴까. 팔뚝 만하게 부풀어 솟은 죽순을 만나는 순간 저절로 터지는 행복한 탄성이다.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