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 연재 (9)
여기서 족히 인(仁)을 볼 수 있나니(2)
황상과 황경 두 형제는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지난 해 아버지 황인담의 기일 때 만난 후 처음이었으므로 1년이란 세월이 지내서야 만난 셈이었다.
“형님. 지난 아버지 기일 때 못 찾아와서 죄송하구만이라.”
“몸이 불편해서 못 왔다고 들었네. 그래 지금은 괜찮은가?”
“네. 그나저나 저는 우리 형님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구만이라. 훌륭하신 형님이 계신께로 아부지가 안 계셔도 항상 든든한 생각이지라.”
“별소리를 다 하네 그려.”
황상은 빙긋이 웃으며 동생 황경을 바라보았다. 그가 별 탈 없이 살림을 일구고 살아주는 것만도 고마운 생각이었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유인의 삶을 살고자 물려받은 전답을 모두 동생에게 던져주듯 주고 백적산으로 훌쩍 와버린 황상이었다.
“아부지 어무니 묘 벌초는 올해도 지가 할텐께 형님은 신경 쓰지 마씨요.”
황경은 늘 형님이 고맙고 존경스러워 뭔가 자신이 할 노릇을 찾은 궁리 끝에 양친의 봉분 벌초를 해년마다 해오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 황인담{黃仁聃)은 두 아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못난 아비였다. 강진의 아전이었던 아버지는 1807년 3월 16일 즐겨하던 술로 인해 술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연세가 54세였으니 그리 많이 살았다고 할 만한 세월은 아니었다.
그는 늘 술에 취해 살면서 아전 노릇을 하였다. 그러면서 이따금 다산을 찾아가 말을 건네곤 했던 것은 황상과 황경 두 아들이 다산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기 때문이었다.
살아생전 황인담은 어느 날 다산에게 찾아가 자신의 집 이름을 취몽재(醉夢齎)라고 지을 터인데 그에 따른 글 하나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다산은 <취몽재기>란 제목으로 글을 써서 황상 편에 보냈는데, 그 글은 말장난이었으나 황인담에 대한 애틋한 정이 스며있는 내용이었다.
술을 좋아했지만 마음만큼은 순수했고 아전생활에 찌든 마음을 달래고자 ‘취한 꿈을 깨는 집’이라는 당호를 짓고 그에 관한 글을 부탁한 황인담은, 그러나 결국 그 술로 인해 세상을 뜬 것이었다.
황상은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항상 마음이 아팠다. 자나 깨나 술에 취해 있으면서도 ‘나 술 취하지 않았다’고 큰소리를 쳤고, 항상 걸음걸이가 비척비척 해서 볼썽사나운 모습만 보였다. 가장이 그러하므로 집안 살림은 피폐할 수밖에 없었고, 늘 가난이 뒤 따라다녔던 것이다.
황상은 겨우 열다섯 살 되던 해 홀로 동문 밖 주막집에서 지내던 다산을 찾아갔었다. 다산이 1801년 신유교옥(辛酉敎獄)으로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이배되어 강진읍 동문 밖 주막에서 지내고 있을 때였다.
다산은 나주 율정에서 흑산도로 귀양 가는 형 약전과 헤어진 후 처음 강진에 내려왔을 때 사람들의 무서운 푸대접을 받았지만 동문 밖 노파만큼은 그를 받아 들여 기거하게 했다. 강진 고을 사람들은 행여 귀양 온 사람을 돌봐줬다간 크게 치도곤을 당할까 싶어 문을 부수고 담장을 허물어가면서까지 그를 피했던 것이다. 말을 걸면 분명 잠재워 줄 것을 요구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는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학쟁이 죄인이었다.
그 때 다산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흩날리는 눈처럼 북풍이 내게 불어오니 北風吹我如飛雪
남녘 강진의 밥 파는 집까지 오게 됐네 南抵康津賣飯家
그나마 남은 산이 바다의 빛 가려주고 幸有殘山遮海色
대숲 우거져 세월 보내게 되었으니 다행이네 好長叢竹作年華
땅의 풍토 때문에 겨울옷을 덜 입게 되고 衣緣地瘴冬還減
근심은 많아서 밤이면 술을 더 마시게 되네 酒爲愁多夜更加
한 가지 나그네 근심을 생각해 주는 것은 一事纔能消客慮
섣달 전에 동백이 꽃을 피운 것뿐이네 山茶已吐남前花
다산은 몹시 춥던 때에 강진으로 귀양 왔다. 북풍은 살이 에이듯 추운데 그 북풍에 내몰리 듯 남녘의 끝 강진까지 온 것이다. 봉놋방에 종일 앉아 있으려니 생각 할수록 기가 막히지만 문득 밖을 바라보면 그나마 산이 보이고 대숲이 보여서 위안이 되었다. 감방에 사는 사람이 풀 한포기 참새 한 마리에 무한한 생명력을 느끼는 것과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겨울밤은 길기도 했다. 방 안에는 읽을 만한 책 한 권도 없고 그렇다고 번듯하게 지필묵이 갖춰진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그래도 육지인 강진에서 지내지만 형 약전은 흑산도까지 이 추운 날에 어떻게 그곳까지 가셨는지 걱정이 앞서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그러니 노파가 건네 준 술에 손이 자주 가게 되었는데, 추위를 무릅쓰고 붉게 핀 동백을 보니 가느다란 희망을 보는 것 같아 위안이 되었던 다산이었다.
1802년 2월 해를 넘기자 집안에서 어린 종 석(石)이 소식을 들고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집안의 소식을 묻고 나서 다산은 신년득가서(新年得家書)란 시를 짓는다.
해가 가고 봄이 와도 봄인 줄 모르다가 歲去春來漫不知
새소리 날로 달라져 봄인가 싶구나 鳥聲日變此堪疑
비만 오면 고향 향수 등나무 넝쿨 같고 鄕愁値雨如藤蔓
겨울 보낸 몰골이 대나무처럼 여위었네 瘦骨經寒似竹枝
세상 꼴 보기 싫어 방문도 늦게 열고 厭與世看開戶晩
찾아오는 이 없어 이불도 더디 갠다네 知無客到捲衾遲
자식들이 무료함 때우는 법 알아내어 兒曹也識銷閒法
의서를 보고 써서 소식을 보내왔네 訬取醫書付一鴟
어린 종아이가 가져온 편지를 접하고는 千里傳書一小奴
초가주막 등잔 아래서 홀로 긴 한 숨 내쉬네 短檠茅店獨長吁
어린 아들 학포는 아비를 탓하건만 稚兒學圃能懲父
병든아내 옷지어 보낸것은 지아비의 사랑일세 病婦변衣尙愛夫
붉은 찰밥 즐긴 줄 알고 먼곳에서 보냈는데 憶嗜遠投紅稬飯
굶주림 면하려고 철투호를 팔았다지 救飢新賣鐵投壺
답장을 바로 쓰려 해도 달리 할 말 없어 施裁答札無他語
산뽕나무 수백 그루 심으라 채근했네 식種檿상數百株
그리고 다산은 편지를 아들에게 썼다.
--편지가 오니 마음이 놓인다. 중아(仲兒)의 필법이 차츰 나아지고 문리(文理) 또한 나아진 것 같으니 나이를 더 먹은 덕이리라. 때때로 익힌 것이더냐? 절대로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성의를 다하고 힘을 다해 부지런히 써야 한다. 책을 읽고 베끼고 글을 지어야 한다. 글을 지음에 있어 방심은 안 된다.
폐족(廢族)으로서 글을 배우지 못하고 예의를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하겠느냐. 보통 사람들보다 백배의 공력을 들여서 노력을 해야 겨우 사람 축에 들어갈 것이다. 내 고생은 많으나 너희들이 책을 잃고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는 말을 들으면 근심이 사라질 것이다. 백아(伯兒)는 4월에 말을 사서 타고 오게 하여라. 하지만 헤어질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아파오는구나. (임술년(1802) 2월 초이레.
다산은 다시 열흘 만에 또 다시 편지를 보낸다.
종 석이가 2월 초이렛날 돌아갔으니 오늘쯤이나 도착했겠구나. 나는 이 달 들어 심사가 몹시 괴롭다. 그것은 너희들 마음가짐을 볼 때 글공부를 그만두려고 하는 것 같아서이다. 정말로 한낱 비천한 무지렁이가 되려고 그러느냐? 청족(淸族)일 때는 글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도 혼인을 할 수 있고, 군역도 면할 수 있다. 그러나 폐족이 되어서 글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느냐? 글공부는 여사(餘事)에 속하긴 하지만 배우지 아니하고 예마저 없다면 금수와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느냐.
폐족 중에는 이따금 기재(奇才)가 많은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과거 시험 따위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들도 과거를 못 보는 것에 대해 좌절하지 말고 경전에 온 힘과 마음을 써야 한다. 독서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도록 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지난 해 10월 초하룻날 입은 것이다. 어찌 견딜 수가 있겠느냐. (2월 17일)
이렇듯 다산은 자신의 문제와 자식들의 문제로 애간장을 태우면서도 1802년 10월에 서당의 문을 열었다. 지난 해 11월에 귀양을 왔으므로 1년만이었다. 그 때 황상은 열다섯 나이에 다산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 사이 다산에게 어려운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든 판에 귀양 온 지 겨우 반 년 남짓 살고 있던 5월, 강진현감으로 온 이안묵은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다산을 잡아들였다. 여차하면 아예 숨통을 끊을 기세여서 다산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지만 이내 사실무근임이 밝혀져 풀어졌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또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이안묵 강진현감은 1801년 2월 약전과 함께 다산 형제가 의금부에 체포되었을 때 국청(鞫廳)의 사헌부 장령이었다. 다산 형제를 심문할 때 죄인의 기록을 담당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 일도 넘어간 가을, 서당의 문을 열었을 때 황상은 다른 아전 자식들과 함께 가르침을 청했다. 강진읍성 동쪽에 살고 있던 황상은 글공부가 재미있어 한 번도 지각하거나 숙제를 안 하는 일이 없이 동문 밖 주막의 서당엘 다녔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다산이 공부를 파하자 따로 불렀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큰 사람이 될 수 있단다. 내 말 알겠느냐?”
“네.”
“그럼 뭘 해야 되겠느냐? 문학(文學)과 사학(史學)이 아니겠느냐?”
황상은 머뭇거리다가 얼굴이 빨개지면서 떠듬떠듬 물었다.
“그란디 선생님. 저는 세 가지 병통이 있구만요. 첫째는 지가 너무 둔한 것이요, 둘째는 지가 막힌 것이요, 셋째는 지가 답답한 것이구만요. 그러니 지 같은 사람이 공부를 으뜨크름 하것능가요?”
“그렇지 않다. 배우는 사람에게 본디 세 가지 병통이 있지마는 너한테는 보이지 않는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하면 그 폐단이 업신여기는 일을 낳는다. 둘째 글을 지음에 있어 날래면 그 폐단이 덧없게 된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이 허황하게 된다. 둔하다 해도 들이파다 보면 그 구멍이 넓어지고 커진단다. 막혔어도 터지게 되면 그 흐름은 빠르게 된다. 답답하지만 연마를 하게 되면 그 빛이 윤기가 난다.”
황상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이 흘렀다.
“그라먼 선생님. 그 뚫은 것을 어떡크름 해사 씁니까?”
다산이 빙그레 웃으며 차분하면서도 또렷하게 일러주었다.
“부지런함(勤)이니라.”
“통하게 하려면 어떡크름 해사 씁니까?” “부지런함(勤)이니라.”
“연마하려면 어떡크름 해사 씁니까?”
“부지런함(勤)이니라.”
“으게 하는 것이 부지런함입니까?”
“그것은 마음가짐을 확고히 갖는 일(秉心確)이니라.”
황상은 스승 다산으로부터 삼근계(三勤契)를 받는 순간이었다.
황상은 자신의 단점을 말하기를 둔하고(鈍) 막히고(滯) 어근버근하다(戛)고 말했으나 다산은 마음가짐이라고 단순하게 맞받아쳤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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