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연재 (5)
붉은 강물에 내 마음 씻으리(2)
은봉 스님은 황상이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공부를 할 때 고성사 일곱 승려 중 한 사람이었다.
고성사.
예부터 강진현을 감싸고 있는 보은산 우두봉을 일컬어 소의 머리에 해당되고, 고성사는 소의 워낭에 해당된다고 전해져 오고 있었다. 초지(草旨), 가우도(駕牛島), 노우치(勞牛峙), 휴우치(休牛峙안), 쌍목(雙目) 등 소와 관련된 지명이 바로 그것이었다.
와우형국(蝸牛形局).
강진현의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어서 이 같은 명칭이 생겼는데, 사람들은 고성사에서 아침저녁 예불을 할 때마다 울리는 범종소리를 소의 워낭에 빗대었다. 경회(景晦) 김영근(金永根)이 강진현의 옛 지명인 금릉의 팔경(八景)을 노래했는데, 제1경 고암모종(高菴慕鐘)이라고 하여 고성사 저녁 종소리를 팔경 중 가장 으뜸으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바로 그런 고성사의 승려였던 은봉 스님은 황상이 보은산방에서 전심치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슬금슬금 지켜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황상에게 시를 짓는 법을 물었다.
“제가 스승님께 배운 대로 말씀 드리자면 시는 고체시(古體詩)와 근체시(近體詩)로 있는디요, 고체시는 고시(古詩)와 악부(樂府)로 나뉘고 근체시는 절구와 율시, 그리고 배율로 나뉘구만이라. 그란디 근체시의 형식은 일정한 형식과 규칙에 따라 짓게 되았구만이라. 그라고 운자(韻字)란 한 수(首)의 시 안에서 압운된 글자를 뜻하고 있구만이라.”
황상은 은봉 스님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보여주며 스승에게 배운 대로 일러주었다.
옛날엔 쓸쓸하던 보은 산방에 蕭蕭昔日寶恩房
많은 관리가 선생께 모여 든다 投寓百官夫子墻
천리 떠난 나그네 바닷가에 왔으나 千里客身臨海岸
아홉학파에 주역을 해석하니 산등성이 억눌렸다 九家易解壓山岡
좋은 경치라 가는 세월 견디나 煙霞濃涇堪催老
비바람에 흩어진 보따리도 못꾸렸다 風雨支離未束裝
멋대로 살다가는 발자취 못 남겨 浩蕩生涯未筆硯
훗날 흐릿한 학설만 남겠구나 遠尋墜緖渺茫茫
다산선생의 보은산방 시의 운에 따라 지은 보은산방 시였다.
“알겠구만요.”
은봉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씨익 웃고 나서는 총총 사라졌다. 그런데 그날 오후 늦게 은봉 스님이 나타나 멋쩍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꼬깃꼬깃 접은 종이 하나를 슬쩍 쥐어주었다. 황상이 읽어 보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그의 시는 배우지 않았는데도 이미 일정한 수준에 올라와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다산은 은봉 스님이 평소 서기승(書記僧)으로 자처했고 나 또한 그리 대했는데, 네 말을 듣고 보니 시재(詩才)를 보았다고 기뻐했다.
황상은 매일 새벽예불을 마치기가 무섭게 은봉 스님을 만나 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모습을 들은 다산은 사의재(四宜齋)에서,
“내가 10년간 관각(館閣)에 있었지만 은봉처럼 빠르게 발전하는 사람은 첨 보는구나. 더구나 네게 학우(學友)가 생겼으니 이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글씨를 쓰되 단정하고 바르게 써야하는 데 그것이 좀 못마땅하니 네가 그 점을 고칠 수 있도록 하고, 오언고시(五言古詩)를 함께 하고 두보(杜甫)의 시를 매일 일게 하도록 해라”
하고 편지를 보냈다.
극찬이었다. 다산은 이제 또 하나의 시재를 얻었다 싶어 기쁨과 함께 본격적으로 가르치고 싶어 동문 밖 사의재까지 그를 불렀다. 그러나 은봉 스님은 도무지 시 짓는 일에 흥미가 없어서였는지 돌연 고성사로 올라가 버렸다. 다산은 크게 아쉬워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소를 끌고 가듯이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대신, 다산은 황상에게 더욱 열심히 할 것을 주문했는데, 그 때 고성사에서 한 때나마 시 공부를 했던 사람이 은봉 스님이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만나게 되었지만 은봉 스님의 표정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목소리에 힘이 없었고, 어둡기까지 했다.
“병이란 되게 한 번 얻고 나면 쉽게 낫질 않는가 봅니다. 그동안 지병으로 인해 고생도 할만치 했으니만큼 이제 몸을 버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애요.”
은봉 스님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무신 말씀을 그리 하신당가요?”
“우리 불교에서는 진명사(盡命死)와 외연사(外緣死)로 나뉘는데, 진명사의 경우 복이 다해서가 아니라 수명이 다한 죽음이 있고, 수명이 다해서가 아니라 복이 다한 죽음이 있으며, 복과 수명이 모두 다한 죽음을 말합니다. 아마도 소승은 복과 수명이 다한 것 같애요.”
그렇게 말을 말한 은봉 스님은 옛적에 고성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묵고 있는 요사채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다음 날 황상이 아침을 마치고 텃밭으로 나가서 호미를 들고 일을 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정수사에서 범종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절이고 간에 범종소리는 아침예불과 저녁예불을 알릴 때만 울리는 법이었다. 그런데 때 아닌 범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절에서 큰일이 생길 때라야만 있는 것이어서 황상은 옷을 털고 정수사로 향했다.
짐작했던 대로 은봉 스님의 입적(入寂)이었다. 어제 은봉 스님의 말이 여간 심상치 않았는데 이제 그 무겁고 힘들게 하던 몸을 벗어버린 것이었다.
“결코 범승은 아니었제이.”
황상은 다시 한 번 그와 함께 지냈던 고성사의 일을 떠올렸다. 비록 나이는 황상보다 더 많았지만 스승 다산이 이 같은 시재(詩才)는 실로 처음 본다고 말했던 은봉 스님! 사실 스승 다산은 그가 향학의 뜻이 없음을 알고 크게 슬퍼하며 미움을 뿌렸다가도 학문에의 길을 포기하는 은봉 스님을 몹시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황상 역시 그와 함께 스승 다산을 모시고 시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그가 끝내 외면하고 만 것은 몸이 불편했기 때문이었을 거리고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인물을 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절에서는 그를 입감(入龕)한 후 다비장으로 옮겨 화장을 했다. 황상은 끝까지 장례절차를 지켜보며 그가 극락왕생하기를 빌었다.
은봉 스님의 죽음은 황상에게 있어서 다시 한 번 마음의 충격을 던져주었다. 육신이 병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느끼게 하는 그의 죽음이었다.
호생오사(好生惡死)는 인심소동(人心所同)이라. 사는 것은 좋아하나 죽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 사람의 다 같은 마음이다.
옛말대로 사람은 누구나 살기를 원하지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육신에 병이 찾아오면 도리가 없다.
황상은 문득 혜장 스님을 떠올렸다. 스승 다산보다 십년 연하였지만 불혹의 나이인 사십에 입적하고 말았다. 허망하고 또 허망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근세조선왕조의 호국의 승장(僧將)이요, 선서(禪書)가운데 가장 중요시 되고 있는 ‘선(禪)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의 말씀이다‘라고 말한 선가귀감(禪家龜鑑))의 서산대사(西山大師)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절이 대둔사(大屯寺)인데, 바로 그 대흥사에서 나이 서른에 두륜(頭輪) 모임의 맹주가 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일찍이 스승 다산도 혜장 스님을 일컬어 과숙유(果宿儒)라고 말했는데, 과연 학식과 덕망이 높은 유학자라고 말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선(禪)과 역(易)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었다. 하여 스승 다산은 그가 입적하자,
“슬프도다, 아암이여. 그대가 돌아간 지 이미 하루가 지났으니 이제 포희(庖犧)를 보았는가. 또한 능히 조주화상(趙州和尙)을 보았는가. 일생토록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을 염하였으니 진실로 이미 연화세계(蓮花世界)에 있지 않겠는가. 아암이여. 이 두 가지를 그대는 이미 알고 있었도다.”
하고 제문을 지었으니 혜장은 죽어서 왕생극락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황상은 그런 혜장 스님과 스승 다산과의 관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사실 황상이 고성사 보은산방에서 편안히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다 혜장 스님의 덕택이요, 근념(勤念)이 아닐 수 없었다.
황상은 1805년 12월 24일 혜장 스님과 정학연 셋이서 두륜산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두륜산.
중국 곤륜산맥(崑崙山脈)의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서 백두산을 이루고, 해남(海南)에 이르러 그 줄기가 다했다고 고기(古記)에서 말하고 있는 두륜산은, 가련봉과 두륜봉을 상봉(上峰)으로 고계봉, 도솔봉, 혈망봉, 향로봉 등의 풍광은 장관을 이루고 있고, 그 봉우리마다 흘러내리는 계곡이 많아 구곡(九曲)이라 부르고 있었다.
황상은 이따금 보은산을 오르내리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공부만 하고 있는 처지에 헤장 스님이 한 번쯤 대둔사엘 놀러 오라는 말에 몹시 기뻤다. 고성사에서 스승 다산과 함께 주역이며 시 짓기를 하던 혜장 스님이 큰절인 대흥사로 돌아가겠다는 말끝에 황상과 학연에게 한 말이었다.
두 사람은 아침도 거른 채 어슴새벽에 고성사를 나섰다. 강진을 벗어나 해남까지는 30리 길이었다. 거기서도 다시 30리 길을 걸어가야만 겨우 대흥사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두륜산 대둔사.
우람하게 서 있는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십리 숲길은 그야말로 꿈속처럼 아름다웠다. 마치 별천지로 들어가는 듯 구불구불 이어지는 십리 숲길은 각종 잡목숲으로 어우러져 한낮인데도 동백나무 등의 사철나무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둥싯둥싯 솟은 바위틈 사이로 흐르는 계곡은 대자연의 교향악을 듣는 것 같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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