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마이애미지역 한인사회의 옛 모습 ( 3 )
김현철(전 언론인)
한인사회 민주화를 위한 투쟁
이렇게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한인회 등 동포사회를 위한 일들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으나 퇴근 후에는 겨우 최저생활을 영위하는 동포 환자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꾸준히 무료 시술로 이 분들의 고통을 덜어 줬다.
그런데 얼마 후 이 고장의 한인 의사들(당시 6명)이 필자를 안 좋게 욕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자기네들은 동포들에게 치료비를 받는데 왜 필자는 무료치료를 해서 자기네 입장을 거북하게 하느냐? 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료시술’의 목적이 자기네 입장을 거북하게 하려는 게 아닌데다 어차피 필자의 당시 환자들은 빈곤층에 속해서 값비싼 의료비를 내고 의사들을 찾아갈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냥 못 들은 척 했다.
서울에서 침술을 배운 후 가난한 노인들을 상대로 오랫동안 무료 시술을 해온 처지라 가난한 이곳 동포들에게 침을 놓고 돈을 받는다는 게 필자로서는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 후 현재까지도 필자에게 침을 맞겠다는 동포환자는 무료로 시술해 주고 있다.
그러고서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교회에서 만난 동포 중 말이 통할만한 몇 분을 가끔 만나면서 자연스레 한인회 얘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한인회의 행태가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개선 방안을 제시하는 분은 찾을 수 없었기에 슬쩍 필자의 생각을 털어 놓았다. “사회의 흐름을 바꿔 놓는 데는 신문 이상 효과적인 게 없다, 신문을 만들어 보자”고 하자 모두가 “옳은 말이긴 한데 하지만 신문을 만들 줄 아는 분도 없고 모두가 최저 생활을 하는 터라 재정 능력도 없는데 어마어마하게 신문을 만들다니요?”하면서 필자를 약간 돈 사람 취급 하는 표정이 역역했다. 하긴 국내에서 당시의 조선일보사나 동아일보사 같은 신문사만 봤을 테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분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제 필자의 기자 경력을 공개할 수밖에 없구나 싶어서 “실은 서울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왔기에 신문 제작방법은 내게 맡기시고 돈이 많이 안 드니 십시일반으로 재정면에서 뒷받침만 해 주신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고 했더니 모두가 ‘침술사가 기자였다’는 사실에 놀라는 표정들을 짓다가 그 중 한 분이 “돈이 얼마 안 든다는데 그럼 신문을 만드는데 드는 예산 등 상세한 내용을 작성해서 다음 번 모임에서 밝혀 줄 수 있느냐?” 고 주문했다. 그 결과를 보면 진짜 기자생활을 한 것인지 필자를 테스트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찌 됐든 필자에게는 이번 모임에서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 낸 듯 해 내심 기뻤다.
때마침 이곳에 단 하나 있는 교회(현재는 개신교회만 33개)의 교역자가 ‘8인회‘분들에게 ‘여러분들은 이 고장 동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분들이니 이제 막 이민 온 서민층 동포들께도 따뜻한 손길을 뻗쳐 달라’고 요청했는데 평소 그런 일에 별로 신경이 안 가던 ‘8인회’측은 ‘유력한 인사들끼리만 어울리지 말라’는 뜻으로 곡해한 나머지 교역자와 ‘8인회’의 사이가 껄끄러운 관계로 발전하고 있었기에 교역자를 따르던 이 분들은 ‘8인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서 필자의 자세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였다.
당시는 일반인에게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았기에 한글 타자기를 구입하는 등 준비 과정으로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동지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드디어 제호가 ‘우리소식’이라는 A4 용지보다 3인치가 더 긴 ‘리갈싸이즈(Legal Size)’의 조그마한 신문이 8페이지 씩 매 격주 간으로 발행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작은 동포사회에 최소한도의 비용으로 만들 수 있는 싸이즈를 선택한 것이다. 작은 신문이라도 내용만 알차다면 그런대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신문 아닌가.
동지들은 광고, 발송, 홍보 등 신문 제작 일선에 참여하고 필자는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서 기사 취재와 작성, 논설, 편집, 교정, 타자 등 주로 신문 제작의 핵심부분을 책임졌다. 인건비가 필요한 신문이 아니었기에 제작비는 타자기 구입 후 용지대, 인쇄비, 발송비 등 최소한도의 비용이 들 뿐이었고 그 보다는 기사취재 및 작성, 교정, 편집, 서툰 타자 등에 빼앗기는 시간이 하루 평균 3~4시간씩 투입되는 게 가장 큰 고역이었다.
그간 한인회의 문제 점 등을 알게 된 아내도 신문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일(신문제작)을 누군가 다른 분이 해주길 바랐다. 옳은 일을 하면서도 ‘바른 소리’ 때문에 남에게 욕먹는 일을 누가 좋아 하겠는가. 그러나 이 고장에 신문에 경험이 있는 분이 없으니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필자의 몫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아내 앞에서 “기자생활을 접겠다”던 필자의 말은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하게 되었다.
‘우리소식’은 영향력을 의식해 주미대사관을 비롯해서 관할인 애틀란다 총영사관 등 요로는 물론 미주 내 동포들이 몰려 사는 대도시의 신문 방송에도 한 부씩 발송했다. 그 결과 엘에이, 뉴욕, 시카고, 워싱턴디씨 등 도시의 동포 신문 및 방송은 ‘우리소식’에 보도된 기사를 100% 믿어 인용 보도함으로써 그 보도를 통해 현지 동포들이 마이애미 지역의 아는 동포들에게 수시로‘이러이러한 마이애미 한인 사회의 기사를 봤다’며 전화로 알려오곤 했다.
‘우리소식’을 받아 보던 8백리 북쪽, ‘디즈니월드’가 있는 올랜도한인회에서 협조 요청이 왔다. 동포들에게 한인회 소식을 전달하는데 ‘우리소식’을 활용함이 최선책이라는 것이었다.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해서 그곳 동포사회(현재 약 1만명) 뉴스도 크게 다루어 페이지를 12~16페이지로 늘리면서 신문 발행을 위한 재력을 강화해 나갔다. 마이애미 동포들을 목표로 했던 것이 전 플로리다(현 동포 인구 약 5만, 전체 인구는 1천5백만) 지역으로 확장 발전되어 가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반도 크기보다 약간 작은 플로리다 반도는 한반도로 치면 부산의 위치에 마이애미, 서울의 위치에 올랜도, 인천 위치에 탬파, 북한의 원산 위치에 잭슨빌이라는 도시가 있다. 그 중 가장 큰 도시가 마이애미, 다음이 탬파, 올랜도, 잭슨빌 순이다. 참고로 도시간 거리는 마이애미-올랜도 약 330 km, 마이애미-탬파 약 450 km, 마이애미-잭슨빌 약 525 km가 된다. 또 플로리다반도의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는 1,140킬로미터이며 차로 약 11시간이 걸린다. 물론 다리로 연결되는 키웨스트까지 따지면 1,340킬로미터로 차로는 13시간 이상 걸린다. 플로리다주의 크기는 약 17만 평방킬로미터로 한반도(약21만 평방킬로미터다)보다 약간 작지만 전체가 산이 없는 평야지대라 주거 공간은 한반도와 비교할 바가 못 되게 넓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예상한 대로 ‘8인회’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돈 없는 제까짓 것들이 신문은 무슨 신문’하는 자세였으나 매월 두 번씩나오던 조그마한 신문이 시간이 지나면서 주간지로 변하고 지면이 늘고 배포지역도 확장되는데다 ‘미국 내 동포 사회가 민주화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사설과 까싶 까지 실어 동포들의 의식화를 꽤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우리소식’이 나오고 처음 열리는 광복절 기념식 및 한인회 총회에 필자가 취재를 위해 나갔을 때 총회의 사회자가 뜬금없이 ‘우리소식 김 아무개 기자를 한인회 이사로 추대하니 박수로 지지 의사를 표해 주세요’ 해서 깜짝 놀랐다.
필자는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서 정중하게 “신문 만드는 사람은 언론 본연의 직무 수행을 위해 한인회 이사가 되어서는 안 되니 없던 일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하고 앉자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마 이날 사회자 측(‘8인회’)은 ‘이곳 동포사회에서 큰 감투(?)인 이사직이니 감지덕지 하지 않겠냐?’ 또는 ‘골치 아픈 기자를 자기들이 포섭해서 자기네에 유리한 신문을 만들자‘는 등 꼼수를 부리는 구나’싶었다. 그렇다면 필자의 이사직 수락 거부 발언은 ‘8인회’ 멤버들에게는 괘씸하고 불쾌한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계속)kajhc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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