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마이애미지역 한인사회의 옛 모습 ( 2 )
김현철(전 언론인)
계약서 없는 구두약속은 안 지켜도 되는 미국?
미국 북쪽 큰 도시의 비행장 땅을 처음 막 밟은 후 이른 아침마다 동포들을 위한 한국어 방송이 시작될 때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애국가를 들으며 부부가 함께 향수에 젖어 눈물을 글썽인 지 불과 2주일 만에 미국의 최남단 플로리다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포 신문사의 박봉으로는 네 식구 (부부, 1남1여)의 생활이 어려워 대우가 월등히 나은 직장을 찾았기 때문이 었다. 필자가 서울에서 기자생활 중 ‘맹호’, ‘백마‘, ’청룡’ 등 한국군이 나가있는 베트남 전쟁 종군기자로 발령이 났을 때 당시의 의학으로는 거의 불가능했던 ‘허리디스크’ 문제를 해결해 주어 베트남으로 출발할 수 있게 해 준 의술이 바로 침술이었다. 그 때 느낀 감격으로 귀국 후 야간을 이용해 침술, 지압, 부황, 뜸 등 대체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전문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극빈 노인들을 상대로 무료시술을 하는 등 임상 경험이 5년이나 지난 뒤에 미국에 왔으니 침술 등 몇 가지의 대체의학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후였다.
그 덕에 미국 의사에게 침술을 가르쳐 준다는 조건으로 남부플로리다에 있는 미국의사의 클리닉에서 침술사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운이 좋았든지 수십 명의 의사들에게서 실망한 환자들이 필자에게 치료 받고 치유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필자에게는 뜻밖의 “미라클 닥터”(기적적인 의사)라는 별명이 생겼다.
환자의 수가 날로 늘어 하루 평균 25명 정도의 환자를 보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금도 당시의 환자들이 써 보낸 감사 편지를 읽노라면 벌써 40년이 된 그 옛날의 침술사 시절이 그리워지곤 한다.
침술사가 드물던 시절이라 현지의 의사협회 회장이 “이제야 침술사를 발견했다”면서 이틀 간 두 시간씩 모두 네 시간 강의를 해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해 왔다. 필자는 시간 당 3백달러(현 $1,000 이상의 가치)의 강사료와 강의 시간이 토, 일 등 주말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 승낙했다.
우애공제조합(비영리단체)인 ‘피디아스 기사단(Knights of Pythias)’의 회의실에 마련된 강의실 현장에 나갔더니 120여명의 의사들이 강의실을 빼곡히 메우고 있어 놀랐다. 중공에 다녀 온 ‘닉슨’ 대통령의 핑퐁 외교 덕분에 침술이 들어 온 지 불과 얼마 안 되었을 때라 미국 의사들의 침에 관한 관심이 대단함을 실감하면서 짧은 영어로, 그것도 평생 처음으로 백여 명의 푸른 눈
의사들 앞에서 실수 없이 하루 두 시간씩 이틀간의 강의를 마칠 수 있었음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한가지, 답답했던 것은 의사들이 ‘기(氣)’의 뜻을 얼른 이해하지 못해 애를 먹었던 일이다. 당시만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질 않는 의사들이었으니 한동안 설명하다가 더는 안 되겠다싶어 “여러분 눈에 전기 줄은 보이지만 그 안에 흐르는 전기 그 자체는 안 보인다. 그렇다고 전기가 없는 것이냐? 기도 아직은 현대 과학으로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침술의 치료 효과가 기를 입증한다.”고 하자 고개들을 끄덕였다.
강의가 끝난 후 수강생들의 반응이 불과 네 시간의 강의였지만 ‘쉽게 설명해 주어 대부분이 침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겠다는 반응을 보여 줬다’는 초청자 측의 전언을 듣고 기뻤다.
그런데 약속했던 네 시간의 강사료가 $1,200 이라야 할 텐데 협회장이 건네준 봉투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600만 들어 있었다. 필자의 놀란 표정을 본 협회장은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맞아요, 약속은 그랬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서...”하고 얼버무리면서 “우리가 계약서 같은 것도 작성하지 않았으니 그걸로 됐다”고 잡아뗐다.
첫 한 시간 강의가 끝나면 10분간 커피 타임이 있었는데 그 때 의사들끼리의 얘기 중 4시간 수강료를 6백 달러씩 냈다는 사실을 듣고 알고 있었지만 그 런 걸 따져 봐야 미국 의사들도 한국 의사들처럼 구두로 한 약속을 지키리라 믿었던(당시만 해도 국내 의사들은 그랬다) 필자에 잘 못이 있었음을 알았기에 간단히 “우리 한국에서는 남아일언중천금(A man never goes back on his word.)이다. 의사나 변호사와의 약속은 계약서를 쓰나 안 쓰나 똑같은 효과를 발휘하는데 미국은 의사들마저도 그런 도덕성 같은 것은 없냐?”고 조롱하듯 말해 주고 자리를 떴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말로 한 약속은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 사회의 인텔리 층에 속한다는 의사도 말로 한 약속은 무시해도 된다는, 양심이 올바른
장사치만도 못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공제회 자체가 비영리 자선단체라 대실료도 거의 무료였을 테고 의사 한 명당 네 시간의 침술 강의료를 $600씩 받았으니 7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린 것이다. 당시 미국 내 일반우표(First Class, 1온스=약 28그램까지)가 10센트였으니 물가 상승률을 감안한다면 현재의 화폐가치로는 최소 20만 달러(한화로 약 2억)는 되는 액수가 아닌가.
그 후 필자는 계약서 없이 말로만 하는 구두 약속은 한인 동포가 아닌 한 절대로 신뢰하지 않게 되었으니 미국에서 살아가는 방법의 하나를 비싼 값을 치르고서야 터득한 셈이었다. (계속) (kajhc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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