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검소한 미국 부자들을 배우자
김현철(전 언론인)
필자가 30 여 년 전 미국에 막 이주했을 때 미국 부자들의 검소한 외모를 보고 놀란 일이 있었다.
미국에 막 이민 온 외국인들의 대부분은 월세 아파트에서 살다가 미국 사회를 배우고 난 후에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이 통례다.
필자도 한 지역에 세 개의 아파트 단지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 난 부자(억만장자 = Billionaire) 소유 아파트에 입주하기로 하고 계약을 하기 위해 전화로 예약 후 아파트 관리사무실에 들렸다.
사무실 주차장에 막 도착했는데 미국에서는 가장 값이 싼, 그것도 허름한 소형 '포드' (Ford) 고물차 세단 한 대가 필자의 차 옆에 서더니 관리사무실 직원처럼 아주 소박하지만 깨끗하게 차려 입은 중년 아저씨가 차에서 내려 필자를 뒤따라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혹시 미스터 김 아니냐?'고 인사를 했다. 들어 보니 바로 전화 속의 주인공이었다.
바로 이 아저씨가 억만장자로 소문 난 사장님이라니! 그야말로 '겉 다르고 속 다르다'(Appearances are deceptive)는 속담이 어울렸다.
당시 필자는 억만장자 사장님이 아파트 관리실에 있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 한데다 그의 소탈하기 짝이 없는 옷과 자동차를 보고 놀라면서 필자의 헌 차보다 더 허름해 보였던 사장님의 차가 몇 년 식이냐고 물었다.
돌아 온 대답에 또 한 번 놀란 것은 이 차를 산지 18년, 마일리지(주행거리 = Mileage)는 20만마일(32만km)이 넘었는데도 성능이 좋아서 앞으로도 말썽이 없는 한 계속 타겠노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오래 사는 동안 알게 된 것은 직업상 어쩔 수 없어서 신사복에 넥타이를 매야하는 정부 고위 관리, 변호사. 은행 또는 보험사 직원 등 특수직 말고는 신사복은 친지의 결혼식이나 파티 참석 때 등 특별한 경유에만 입고 평소에는 간편하고 소박한 복장을 한다는 것, 자동차도 돈이 많은 부자들일수록 보통 때는 눈에 뜨이지 않는 허름한 것을 타고 다니고 특별한 경우에만 차고에 세워 둔 좋은 차를 탄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대부분의 미국 부자들이 상상 밖의 소박한 삶을 사는 이유는 일반인들 눈에 띄게 옷치장을 하고 좋은 차를 타서 자신이 부자임을 알리게 된다면 좋은 것보다는 나쁜 점이 더 많다는 이유에서다.
첫째, 자신의 얼굴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대중 앞에서 항상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부자유가 뒤따르고 둘째, 남에게 자신의 거주지가 노출되면 도둑 걱정도 해야 되며 또 자신을 목표로 강도사건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 셋째 어려서부터 수수한 복장으로 살아 왔기에 남을 의식하지 않고 허름한 편한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타인에게 폐가 되지 않는 한 남이 무슨 일을 하건 관심을 갖지 않는 사회 풍조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문득 떠나 온 모국인 한국의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체면상, 없을수록 무리를 해서까지 좋은 차를 타려들고 옷도 필요 이상으로 값비싼 것들을 입고 다녀야 남이 얕잡아 보지를 않는다는 '허세'(=虛勢=Bluff)로 가득 찬 사회가 아닌가? 여성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우리 속담에 "빈 수레가 요란하다"(Empty vessels make the most sound)고 했던가?
남녀 간에 선을 보기로 해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남성이 선 볼 장소가 집에서 가까워 비싼 '벤츠 S 600' 차는 집에 두고 부담 없이 '티코' 소형차를 타고 나갔는데 주차하는 것을 본 색시 측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다음에 보자는 한마디를 던지고 사라지더란다. 그 후 연락이 없기에 전화를 걸었더니 역시 전화도 안 받더라는 것, 그 때서야 자신이 값싼 소형차를 그녀에게 보여준 것이 화근이었음을 깨닫고 차라리 그런 여성이라면 더 사귀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결과적으로 이 여성은 상대방을 외모로만 판단한 실수 때문에 돈 많은 이 남성을 놓치고 마는 결과를 가져 왔다.
하긴 한국 여성들의 일상 외출복은 미국서는 파티에 갈 때나 입는 성장 아니면 안 되는 세상이 아닌가.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민족의 몸에 배어있는 '체면'을 중시하는 버릇이 '허세'와 같은 위선이라면 '깊은 물일수록 고요히 흐른다'(Still waters run deep)는 격언처럼 이제는 자신 있는 삶을 겸허하게 살아가고 있는 미국 등 앞서가는 나라 사람들의 실속 있는 삶을 배워서 '허세' 대신 '성실'한 삶의 자세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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