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마다 고운 꿈을
장생주
이삿짐을 챙기다 허름한 책속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보아 하니 낯익은 이름이다. Y양! 30여 년이 넘도록 잊히지 않은 그녀. 편지의 사연이 정겹다.
그 해 여름 나는 신병치료차 낙향하여 틈틈이 농사일을 거들어주고 있었다.
그 무렵 내 고향에선 마을문고가 한창 붐이 일고 있었다. 마을마다 문고함이 전해지고 문고함엔 소설책이나 농사에 관한 책 그리고 새농민지 같은 월간지들이 차근차근 채워지고 있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내 고향 하당 마을 청소년들이 모였다. 하당 마을문고는 창립되었으나 유명무실하므로 명실상부한 마을문고로 재정비 활성화시켜 보자는 모임이었다. 그때 나를 마을문고 회장으로 뽑았다. 아마도 사범학교를 나와 시골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사람이었으니 뭔가 적임자라는 생각들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을문고회장. 내세울만한 직함이 아니었다. 아무도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고향에 머무는 동안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그래서 시골 벽지에서 마을문고운동을 펴나가기로 했다. 먼저 마을회관 벽에다 마을문고 회원모집 광고를 냈다. 입회자격은 남녀노소 누구든지 상관없으며 책 두 권씩만 내놓고 입회하도록 했다. 그래서 모인 회원이 처녀 총각들 17명. 우리는 제법 농촌발전의 기수라도 되는 양 긍지를 갖고 주경야독을 시작했다. 책을 돌려 읽어가며 독후감도 쓰고 독서토론도 하고 제법 의욕적인 독서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읽고 싶어도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 작업을 벌려 책을 공동구입하기로 했다.
어느 달 밝은 밤이었다. 우리는 어느 부잣집 벼논에서 벼 베기도 하고 보리갈이도 했다. 그래서 그 품삯을 받아 책을 구입 장서를 늘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들의 욕심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신문과 새농민지에 "시골 마을문고에 책을 보내 주셔요."하고 하소연을 했다. 그런데 신문과 잡지의 위력은 참 대단했다. 전국에서 많은 분들이 책을 보내 주었다.
그때 Y양도 서울에서 꽤 많은 책을 보내 주었다. 그런데 Y양은 좀 특이한 데가 있었다.
"전 여고를 졸업하고 1년 간 재수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전 며칠 후이면 수녀원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했어요. 그래서 평소에 제가 가장 아끼던 책들을 책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여러분들에게 보내드리기로 했어요. 어쩌면 제 분신 같은 책들, 소중하게 간직하여 유익하게 활용되었으면 합니다."
간결하면서도 의미가 깊은 사연을 대하고 보니 왠지 찡하게 가슴을 울리는 게 있어 나는 고맙다는 긴 답장을 썼다.
그런데 며칠 후 또 몇 권의 책과 더불어 편지가 왔다. 책 속에는 갖가지 예쁜 꽃 이파리와 단풍잎이 곱게 곱게 스크랩이 되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꽃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책갈피마다 고운 꿈을 엮어가던 소녀의 기도! 추억이 사리사리 서렸음직한 꽃잎의 사연! 가슴 뭉클한 감동이었다. 당시 소설을 쓴답시고 그러잖아도 감성적이던 나의 고독은 한 소녀를 동경하고 깊은 연민에 빠져들 듯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편지가 자주 오고 갔다. 그러다 그녀가 부산의 성프란체스카 수녀원에 들어간 후론 편지가 끊기고 말았다. 어쩌면 사랑이 싹틀만한 때 그녀는 내 곁을 떠나고 말았지만 예비수녀와 예비문인과의 아름다운 인연은 마을문고가 맺어준 고운 추억이었다.
퇴색한 그녀의 편지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지금도 책이 없어 책을 못 읽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느 두메산골의 청소년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제 마을문고가 태동한 지 48년. 한 때 전국 2만여 문고가 설립되었으니 가히 전국은 독서하는 풍토로 혁신되었을 법 하지만 지금도 농촌에서 혹은 산촌이나 어촌에서 안으로 꿈을 추스르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어느 꿈 많은 젊은이나 소녀에게 꿈을 심어줄 책을 보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도 책을 기다리고 있는 마을문고나 시골 청소년이 있는지도 궁금하지만…….
장생주
월간문학 지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회원.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역임
전남문협회원. 광주문협회원. 현 월간「삶을 가꾸는 사람들」편집장
저서 : 수필집 「허공을 지나는 한 점 바람」「이 잘 될 놈아」외 .
전기집 「다산 정약용」외 공저 수필집 다수. 수상 : 전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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