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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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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병원일지 -정선례
정선례(강진여성산문동아리회원)

병원일지                                                            정선례(강진여성산문동아리회원)

 

 

계절이 바뀌고 있다. 부채 모양의 은행잎 사이사이 푸르스름한 은행 알이 주렁주렁 달려 살구 빛깔로 물들고 있다여기 병원과 나이가 비슷함직한 제법 커 보이는 은행나무다. 입원실 창문을 가려 큰 키를 자랑한다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다잔가지를 에워싸듯이 다닥다닥 무수하게 달린 재래종 은행 알이 투명한 햇살에 제 살 익히는 게 보인다.

  예전에 앓았던 질환의 후유증인지 눈도 흐리고 기력이 없었다한 시간 일하면 30분은 쉬어야 할 정도다올해도 진작 입원해서 몸을 돌봐야 했지만 농사일이며 축사 일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남편이 염려되어 입원 결정을 미루어 왔다그러다가 내 몸 잘 추스르는 게 가족을 위하는 길이란 생각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입원하였다.

 평소 자주 쓰는 세면도구와 수건양말이며 속옷이며 텀블러, 슬리퍼를 챙겼다.

  “또 뭐가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다가 온열 전기매트를 챙겼다복용 중인 약도 따로 챙겼다종류별로 다 가져가야 한다경험상 병원에 보여야 중복처방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 도착하니 벌써 11시다점심시간 전 입원 수속을 마치려면 원무과에 서둘러 접수해야 한다그리고 교수님의 진료를 받아야 한다담당과 낯익은 간호사님이 환한 얼굴로 반긴다교수님 앞에 앉았다. 기본 검사와 CT, 뇌파, 심장초음파, 엑스레이동맥경화검사체열 검사신경계내분비 검사 결과 대체로 양호했다

 

집에 가셔서 관리 잘 하셨어요? 그런데 좀 걱정이 하나 있네.”

교수님 뭔가요튀김라면 종류 거의 먹지 않았고요운동도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혈당수치중성지방 수치가 높고 콩팥 기능이 살짝 떨어졌어요우리가 막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주의를 하셔야겠습니다우리 선생님들에게 건강식품일지라도 가지고 오신 약 다 보여주세요그중에 저희가 복용할 수 있는 것만 말씀드릴게요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나름대로 관리를 잘하셨네요가족력이 있으면 더 노력하셔야 해요.”

  한약과 침 치료추나체외충격파물리치료파라핀부항양생 치료요법 처방이 내려졌다매년 오는 곳이라 병원 구석구석이 낯익다치료사 선생님들도 친근하고 정겹다우리 과 교수님이 병원장님에 취임하자 곧 3층과 5 6층 입원실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이 이루어졌다그래서인지 환자들이 대거 밀려 벌써 예약 환자들이 여러 명 대기하는 상황이라 한다교수님과 간호사님이 이리저리 알아보시더니 7층 한 호실을 내어 주셨다. 입원실에 들어서니 한동안 비워뒀는지 공기가 탁하다. 창문을 죄다 열고 짐을 풀었다다인실인데도 1인실처럼 혼자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다른 환자들이 없는데다 가구며 침대 등 여러 시설이 편리하고 깔끔해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흉이 복 되었다고나 할까? 치료실을 오가면서 작년에 함께 방을 쓰며 친하게 지냈던 환우를 만났다. 그녀도 며칠 전에 입원했단다. 밥도 잡곡밥에 알탕, 된장국, 짬뽕 등 매 끼니마다 새롭다. 내가 좋아하는 잡채며 버섯, 콩자반 등 식단이 다채로워  잃었던 입맛이 되살아날 정도다.

 치료가 익숙해지자 여느 때처럼 병원과 연결된 배봉산 둘레 길을 짬짬이 찾아 걸었다치료가 없는 주말에 나처럼 운동 좋아하는 그녀를 부추겨 함께 숲을 찾았다넥타이처럼 구겨진 산길을 따라 걷다가 끝나는 지점에 당도하면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콧구멍이 뻥 뚫리고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상쾌하다.

 계절을 순환하며 꽃을 피워 내는 산에 들어와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숲 내음에 복잡했던 마음이 저절로 치유되는 듯한 기분에 젖는다자연의 일부가 되어 성마른 성품의 자아가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시간이다가만히 귀 기울여보니 새와 곤충들이 각자 자기의 소리를 뿜어내고 있다다들 자연과 조화로운 몸으로 밖의 세계와 긴밀히 조응하고 있다.

길이 나눠지는 산자락에서 비 온 뒤의 꾸들꾸들 말라가는 흙길을 일행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어느덧 숨이 거칠어진다작은 돌 위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기로 했다저 아래 구부러진 산길 펀펀한 자리에 클로버 한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어릴 적 클로버로 꽃반지를 끼워주고 꽃시계를 만들어 손목에 채워주던 친구가 어렴풋이 떠올라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꼬마 소녀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고개를 길게 빼어 풀숲을 헤집으며 네 잎 클로버를 찾았었다.

 “찾았다!”

기쁨이 출렁거리는 목소리가 대지를 울렸다처음으로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한 그 감격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다곤고한 삶의 길 위에서 한번 더행운'이라는 꽃말을 가진 네 잎 클로버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등산로를 따라 수령 50년은 족히 넘었음직한 벚나무가 하늘을 가린 채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봄에는 아마도 풍성한 꽃망울을 터트려 벚꽃 터널을 만들었을 것이다산행하는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연출하며 발걸음 가볍게 했을 그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하산하는 길에 오랜 전설이 깃들었음직한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대왕 문어발 같은 굵은 다리를 오솔길에 척 걸치고 뭇사람들의 산행을 지켜봐 준다태풍과 천둥 번개의 온갖 시련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아 주변 나무들을 어우르며 구순하게 서 있는 모습이 경외감마저 들게 한다노거수를 끌어안고 기도하듯 한동안 서 있었다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그 옛날 나무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다모든 자연물은 정령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나무 하나 하나와 대화할 수 있는 인디언의 교감 능력을 닮고 싶었다대화와 교감은 그 바탕이 사랑이다사랑이 관심을 일으키고 관심이 대화를 만들고 대화가 다른 대상을 이해하게 만드는 법이다그러므로 나무를 껴안고 기도하는 시간은 깊은 영혼의 마음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며 내 안에 사랑이 물큰 젖어 흐르는 시간이었다치료 과정에서 쌓인 고단함과 한기가 조금씩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나비도 꽃잎에 앉아 날개를 접어 쉬고 노래도 쉼표가 있어 한 박자 쉬어 가는 데 난 그러지를 못했다그러다 결국 생과 사의 경계에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잘린 나무처럼 픽 쓰러졌다그 결과 일상에서 물러나 힘든 날들을 보상이라도 받듯 지금 긴 쉼을 누리고 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족이 늘 1순위였고회사 일이 2순위살림이 3순위농사일이 4순위건강은 저어기 7순위쯤 두었다몸이 보내는 신호에도 괜찮아지겠지 간과했다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경험으로 아는 일이지만 지나고 나서야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을 깨닫는다이런 우를 범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인데 어리석게도 그렇지를 못해서 그 사단이 났던 것이다. 경계를 지나온 그 순간이 어제 일인 듯 또렷하다그렇지만 묵은 상처는 언젠가 빛 바래지리라 믿는다. 치료는 물론이거니와 여기 머무는 동안 손 하나 까닥 안 해도 밥 주고 빨래해 주어 마냥 편하다주부의 빈자리로 집안 살림은 뒤죽박죽이 되었겠지만 잠시 잊기로 한다몸으로 견디며 신산스럽게 통과해 온 잿빛 과거는 훌훌 털어버리고 현재와 미래만 생각하자고 단단히 마음먹었다뿌리 깊은 나무가 무성한 잎과 탐스러운 열매를 매다는 것처럼 몸이 튼실해야 마음 자락 또한 단단해진다는 것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새로운 한 주가 또 시작되었다오전 치료를 마치고 호실에 들어왔다. 노랗게 물들인 파마머리를 위로 바짝 묶어 올린 60대 초반의 환우 한 분이 들어와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신발은 저기 입구에 벗어놓고 올라오셔야 합니다.”

 “뭐라고요나는 원래 집에서도 항상 신발을 신고 다녀요.”

새로 입실한 환우가 크록스 슬리퍼를 입구에 벗어놓지 않고 맨발로 다녀야 할 방바닥을 버젓이 끌고 다니지 않는가미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낮은 목소리로 일렀다그랬더니 퉁명스런 대답이 뾰족하게 찔려온다. ‘와 강적이네, 만만찮다' 예상치 못한 역공이었다.

뒷날 여럿이 사용하는 공동 목욕탕에 문제의 그분이 들어왔다. 입구에 신발을 벗어놓지 않고 막무가내로 탈의실이며 목욕탕을 슬리퍼를 신은 채 사용하고 있었다몸에 비누칠을 하며 잔뜩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던 어떤 이가 화를 누르며 따져 묻는다.

  “아줌마 신발을 벗고 들어오셔야지 그대로 들어오시면 어떡해요얼른 벗어놓고 오세요.”

  새 환우는 늘 그런 식으로 살아왔는지 나를 비롯한 여러 명의 항의에도 조금도 밀리지 않고 맞대꾸한다이윽고 서로 눈을 치뜨며 고성이 오갔다금방이라도 육탄전이 벌어질 것 같다목욕탕 밖에까지 그 소리가 들렸는지 곧바로 간호사가 뛰어왔다일촉즉발 팽팽한 긴장이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다툼이 반복되자 새 환우는 벌레 씹은 낯빛으로 짐을 싸들고 결국 층을 바꿔 다른 호실로 옮겨갔다.

한 사람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여러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대다수가 싫어하는 행동을 왜 고집하는지 씁쓸했다현대인의 고질적 병이 정서 불안이라고 한다물질주의기계 주의가 포근한 인간성을 멍들게 하고 있다질병을 치료하고 조용한 곳에서 좀 쉬려고 입원한 환우들끼리 꼭 이래야 할까역지사지를 한 번쯤 떠올려 본다면 이런 갈등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

  인간은 누구나 홀로 왔다가 홀로 간다사는 동안 조금씩만 상대를 배려하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가치를 깨달았으면 싶다. 나를 비롯해 지금 아프신 모든 분이 부조화로부터 조화로운 영혼으로 바뀌어 일상의 회복을 기원한다

우리 조금만 더 힘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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