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행사에서 태극기 뺏지를 나눠주어 행사 내내 옷에 달고 있었다. 나라사랑 애국정신을 첫 번째로 꼽는 분의 행사로서 예전 행사에서도 태극기 뺏지를 나눠주곤 했는데, 이날의 태극기 뺏지를 보면서 가슴에 달아야 하는지 망설여지는 나에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머릿속으로는 국민들의 촛불을 꺼버리겠다고 움직이는 태극기부대 집회자들이 한바탕 휙 지나갔다. 나도 마치 그들 속에 속하여 촛불의 반대편에 선 사람처럼 있을 때, 나의 맹한 몸을 빠져나온 나의 혼이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태극기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박사모 회원들이 주를 이루는 집회자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오면서 태극기가 무섭게 보인다. 태극기부대 집회자들은 태극기가 휘날리면 촛불은 꺼지고 만다고 외치고 있는데, 그러다가 태극기에 촛불이 붙으면 어떻게 하나 불안하기도 하다. 태극기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국기이기에 신성함을 갖고 있다. 그런데 태극기를 집회에 들고 나와 촛불에 맞대는 것은 태극기를 태워서라도 그 무엇을 건져야 하는 간절함이 있는 것일까. 태극기를 들고 애국으로 무장한 간절함은 촛불을 켜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나온 다수의 국민들의 간절함과 왜 그리도 다른가. 우리의 미래는 남북으로 갈라진 아픔보다 ‘우리가 남이가’로 갈라진 영호남의 현실보다도 더 큰 또 하나의 문제만 남게 됐다.
2016년 10월 26일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뒤,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탄핵이 234표로 가결되면서 촛불의 승리로 잠잠해질 듯 했지만, 태극기부대의 집회는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까지 참석하면서 분노를 폭발하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현실이 벌어지게 된 것은 국가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국론 분열을 조장해온 사람들 때문에 시작됐다고 본다. 그래서 요즘 진행되는 특검을 통해 가장 제대로 밝혀져야 할 것은 전경련을 통해 삼성·현대차·SK·LG 등 대기업에서 돈을 걷은 뒤 보수단체를 지원한 정황이라 생각된다. 구시대의 유물을 그대로 갖고 현 시대에 맞추려한 현 정권의 출발은 감금과 잠금을 구별하지 못하던 시작부터 잘못됐다. 중국 고사성어에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농락해 권세를 휘두르는 것을 말한다. 진나라 시황제 시대에 조고라는 환관이 있었다. 조고는 시황제가 죽자 태자 부소를 죽이고 어리고 어리석은 호해를 내세워 황제로 만든다. 어린 황제를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조고는 사슴 한 마리를 황제에게 진상하면서 명마라고 말한다. 이때 어린 황제도 사슴임을 알고 '정말 사슴이냐'고 묻는다. 이에 조고는 대신들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자 대신들 중 대부분은 조고의 위세에 밀려 말이라고 답했고, 일부 사슴이라고 답한 대신들은 죽음을 당했다. 현 정권의 핵심인물들 중 국민을 허수아비로 생각한 조고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분명하다. 만약, 조고가 태극기부대에게 일제강점기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만세를 불렀던 유관순 누나처럼 열사라고 말한다면, 그들 모두가 열사가 되는 나라가 다시 되어야 할 것인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촛불은 누가 들어도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태극기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로서 분명 그 품격이 지켜져야 한다. 그래서 지금처럼 태극기가 집회에서 도구처럼 사용되는 것을 법으로 막아야 할 것이다. 지난 1월 25일 박근혜대통령은 팟캐스트라는 보수 개인방송을 운영하는 정규재라는 사람과 인터뷰를 했다. 그 인터뷰 내용을 보면서 나는 박대통령이 ‘품격’이라는 단어를 두 번 이상 쓴걸 보았다. 정윤회와의 밀회관계 질의에 대해 “품격 떨어지고 민망스러운 이야기다”라고 했고, 정유라가 박 대통령의 딸이라는 루머에 대해서는 "품격 떨어지는 이야기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품격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는 두 가지가 나와 있다. 첫째,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다. 둘째,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이다. 그럼 지금 국민들에게 느껴지는 박대통령의 품격은 어떠한가. 최순실 게이트로 밝혀지는 온갖 국정농단들이 픽션이라면, 성경보다도 훨씬 잘 짜여진 세계최고의 베스트셀러감이라 할 것이다. 자신의 품격을 지키려다 국격을 떨어뜨린 어마어마한 결과 앞에서도 현실인식을 전혀 못하는 대통령을 다시 뽑아서는 안 되리라. 그 하나의 예로 놀라운 것이 있다. 그것은 박대통령 당선 시 대변인으로, 여성가족부장관으로, 이후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으로, 문화체육부장관까지 계속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며 함께 했던 조윤선 전 장관이 박대통령과 한 번도 독대를 한 적이 없다고 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후 재벌들과는 두 번 이상씩 독대를 했다는 대통령을 알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박대통령은 국가의 일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재벌들에게서 돈 뜯어내는 일에만 열열 관심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돈을 국민을 위해 쓰려고 노력했다면 위안이 될 터인데, 최순실이라는 여인과 최근 한마디로 일축된 ‘염병’을 했다는 것에 더욱더 화가 나는 일이다.
지난 2월 3일 특검의 청와대 압수수색이 무산되는 것을 보면서, 청와대는 우리나라에 떨어져 있던 외계인들의 우주선처럼 느껴졌다. 국민들에게는 법의 잣대를 들이대다가 자신은 그 법을 거부하고 있으니 외계인이 아니고 무엇이랴. 대통령을 수사할 특별검사도 대통령인 자신이 임명해야 하고, 대통령의 탄핵을 결정할 헌법재판관의 빈 자리도 대통령이 임명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법 자체도 외계인 일처럼 우스꽝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거대한 폭발음과 화염을 내뿜으며 어디론가 떠나는 우주선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보다도 당장 우리의 내일이 걱정된다. 다가오는 3.1절에 집집마다 걸게 될 태극기의 품격이 어떻게 보일지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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