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진만 햇발 >
청출어람(靑出於藍)
송 길 화
광주시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매년 이맘때면 생각나는 한 제자와의 아련한 추억이 있다.
몇해 전, 전방부대 견학활동으로 학생들을 인솔하는 버스 안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저… 제자 K입니다.”
K가 누굴까? 그동안 가르친 제자들 속에 기억을 더듬어 K를 떠올려보았지만 세월의 탓인지 이름만 듣고 곧바로 생각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동안 가르쳤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어렴풋이 시골아이답게 순진한 눈망울의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소년의 모습에서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반가움에,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그날 저녁 강화도 유스호스텔 로비에서 누군가 나를 찾는다고 해서 나가보니 40대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선생님, 접니다. 오전에 전화드린….”
나는 가까이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내가
강진 군동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가르쳤던 제자였다. 그때는 13세 소년이던 그가 벌써 그렇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광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오직 교직(敎職)을 ‘천직(天職)’으로 여기면서 초등학교 교사로 39년동안 근무했다. 그동안 1년에 40여 명씩 1,500여 명의 제자들과 만남을 가져왔다. 인간사회에서 만남과 헤어짐은 필연(必然)이라지만 학기 초에 사제지간(師弟之間) 어색하게 만나서 서로 눈빛만 봐도 통(通)하는 사이가 되면 어느덧 진학이나 졸업으로 이별을 하게 된다. 그후 한동안 섭섭한 마음이 앞서 딸아이 시집보낸 친정아버지 마음처럼 그렇게 가슴 한구석이 허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스승의 역할에 충실하고 매순간 최선을 다했기에 그들이 한 단계 성숙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즐거움과 보람을 삼곤 했다.
제자는 30여년 전 초등학교 졸업식 날을 회상하면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이 그러셨지요. 비록 너는 중학교에 진학을 못하지만 곧바로 사회에 나가서 전문기술을 배우든지 무엇이든 한 가지 일에 열심히 노력하면 다른 친구들 보다 6년 먼저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니 더 유리할 수 있단다. 중학교 진학을 못한 것에 대해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거라. 너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그는 내가 한 말을 항상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채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그는 1970년대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못하게 되자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와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면서 지금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의 기술부장으로 외국 바이어들을 상대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잘살고 있다고 했다. K군은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시골 외갓집으로 전학 와서 고아처럼 외롭게 학교를 다녔는데 늘 부모님처럼 따뜻하고 자상하게 대해주셔서 제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꼭 성공해서 찾아뵙고자 피눈물 나게 노력한 결과 오늘의 제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초등학교 2학년 아들과 6살 난 딸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데리고 어려운 시절에 이 세상을 근면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와 희망을 준 선생님을 찾아 뵙고 싶어 밤늦은 시간에 이렇게 강화도까지 달려왔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제자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마음 한구석이 찡해왔다. 한편으로는 훌륭하게 성장해준 K군이 너무나 고마웠다.
K군의 근황을 물어보니, 지금은 경기도 고양시의 한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독거노인, 장애인 등 어려운 이웃과 유년기의 자신처럼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소년소녀가장을 위해 장학금도 내놓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시골의 의붓아버지 생활비는 물론이고 이복동생들을 국립대에 보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참으로 대견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무엇보다도 바쁜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간 나는대로 봉사활동을 하는 그의 넉넉한 마음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제자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직장인으로 생활하는 모습을 보니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뿌듯함을 느꼈다. 제자를 만난 그날만큼은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독차지한 양 무한한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내가 교사로서 비록 작은 가르침을 전해주었지만, 그 작은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훌륭하게 성장하여 오히려 스승을 능가하는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고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사자성어의 의미를 새롭게 떠올리게 되었다.
교권(敎權)이 추락하고 스승의 의미가 퇴색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교사(敎師)라는 직업이 결코 화려하거나 사회에서 크게 대접받지는 못하지만, 나에게 크나큰 감동을 안겨준 제자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오늘도 교육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 더 열심히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인생의 참스승이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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