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 시집을 수없이 읽었던 날들이 있었다. 시인은 홀로서기에 대해서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라고 표현했다. 홀로서 있기에 둘이 만날 수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이 언제든 누구를 만날 수 있던 혼자인 나에 대한 위로였을까. 홀로서기 시집은 20대 나에게 애인이나 다름없는 시집이었다. 그런데 그 시인의 시 중에 ‘이다 혹은 아니다의 틈에서’라는 시가 있다. 이 시가 최근 우리 사회 큰 이슈가 되고 있는 두 분의 죽음을 두고 서로 다른 이념 속 틈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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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꽃이다'와 '아니다' 사이에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와 '아니다' 사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와 '아니다' 사이
이다와 아니다 사이에
시가 있다
새로운 날개를 뻗어 날아간다 아니다
그 자리에서 아래로 추락한다 사이에
시가 있다
모든 정지한 것은 죽은 것이다, 아니다
말의 혼란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찾기는
너무 힘들다 아니다 존재의 본질은
처음부터 이다와 아니다인지 모른다
시가 어렵게 읽히는 것처럼, 최근 죽음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이념에 따라 이다와 아니다 사이 틈에 낀 시를 찾아내야 하기에 이념으로 양분되어 복잡하게 얽히고 있다. 살다보면 많은 인연들이 있다. 언젠가 제주도 올레 길을 걷다 눈에 들어온 팻말이 잊혀 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스쳐가는 인연, 스며드는 인연, 생각하게 만드는 문구여서 가끔 그 팻말이 떠오른다. 스치는 인연이나 스며드는 인연이라는 것이 악연으로 변질되기도 하는데 삶에서 아주 서로 나쁜 인연, 불행한 인연으로 끝을 맺는 경우다. 그런 것처럼 나의 삶 속 인연들을 되돌아보았다. 지나온 많은 인연들이 각기 어떤 향기들로 남아서 삶의 자양분이 되었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참 다행인 것이다.
9일 저녁 즈음, 아들에게서 박원순 서울 시장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핀잔했다가 나중 뉴스를 보고서야 믿었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시장의 전 비서가 성추행 고소를 했다는 뉴스에도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한 중요인물에 대한 좋은 향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은 안타깝고 커다란 충격이었다. 평소 인권운동가로서 권위보다는 소탈한 이미지를 보였던 박시장이 비서를 성추행 했다는 의혹의 고소가 있고,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니 날아간다, 추락한다 사이에 난해한 시만 남은 것처럼 생각에 혼돈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이런 혼돈스런 질문에 대해 나의 한 지인 분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모르겠어. 나는 그런 자리에 안 있어봐서 말이야.”
또 한 분의 죽음은 6.25 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이다. 10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백 장군은 6.25전쟁의 최대 격전지 다부동 전투에서 값진 승리를 한 전설로 회자된다. 그는 공포에 질려 퇴각하는 부하들을 향해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너희들이 물러서면 내가 너희들을 쏘겠다”고 독려하여 선두로 달려 나갔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보다 미국에서 더 추앙받고 대우받는 전쟁영웅이기도 한 백 장군이 한 때는 친일 행적을 하여 그 공과에 대한 논쟁이 되고 있는 점이다. 일본군이 만든 ‘간도특설대’에서 무자비한 독립군 토벌에 복무했다는 비난이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한국군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친일파 경력을 가진 이들이 미국에 의해 군경의 주요 보직을 차지하며 친일파 천국이 되었다. 그로 인해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역사 속에서 백 장군은 한국전쟁의 영웅이 되었고, 두 번의 참모총장과 한 번의 합참의장을 역임하고 교통부장관과 각종 공기업의 요직을 두루 지낼 수 있었다. 백장군은 서울 현충원에 묻히길 바라기도 했지만, 현 정부가 들어선 뒤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여 대전 현충원으로 안장키로 했다고 전해진다.
두 분 죽음이 이념 논쟁 속 중심인물이어서 정치인들이 빈소의 조문을 하느냐 안하느냐 문제까지도 큰 정치적 논쟁을 낳고 있는 시점이다. 역사는 누가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이것이다 믿었던 것들이 아닌 때가 되기도 하고, 그 존재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처음부터 모른 체 역사만이 그 답을 내놓게 되는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죽음으로 모든 것을 안고 갔다고 해서 비서에게 했던 성추행의혹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박 시장의 공과가 아무리 크다 해도 성대한 장례식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진다. 백선엽 장군이 일제강점기에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은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도 간도특설대에서의 복무는 사실인 것이다. 그 반대편에 항일독립군이 있었고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건립되지 못했을 것이 우리나라의 역사다. 백 장군이 살아생전 독립군 후손들에게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라도 남기셨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그 한마디라도 했더라면 더 큰 영웅으로 칭송받는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듯이 박시장은 성추행 고소를 한 피해여성에게 미안하다는 말한마디 남겼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참으로 불편한 진실 앞에 있다. 지금이 2020년이다. 2000년이 언제 될까 싶었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새 20년이나 더 지났다. 그런데 지금도 과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그리고 군부정권과 민주화운동 등의 갈라진 이념에 우리는 갇혀 살고 있다. 그 이념의 틈에 시라도 쓰면 좀 마음이 편할 것인가. 서정윤 시인의 이다와 아니다 그 틈에 이런 시를 쓰고 싶어졌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는에 살아 있는 자들만 시끄러운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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