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지가 아닌데도 고향처럼 살갑게 그리운 마을 강진이여, 그리고 옥빛 바다 서늘한 마량포구여, 당신은 이제 여생을 함께 할 내 마음의 고향이자, 연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해마다 몸과 마음에 켜켜이 생활의 먼지가 쌓여 더 이상 운신이 불편해질 때면 나는 버릇처럼 남도의 당신을 떠올립니다. 그리고는 한가한 날을 골라잡아 당신을 향해 긴박한 부름을 받은 이처럼 부리나케 내달려갑니다.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하고 평화로운 당신의 품에 안길 생각을 하며 당신에게로 가는 동안 나는 생일상을 받은 아이처럼 마냥 내내 행복해집니다. 당신을 떠올리면 당신은 풍경보다는 냄새로 먼저 다가옵니다. 진한 갯벌 내를 풀풀 풍기며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나를 당신의 품 안에 안는 당신!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것은 십년 전입니다. 세상의 운명적인 사랑이 대개 그러하듯이 당신과 나의 만남도 어떤 계획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연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중매쟁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군요. 그곳이 고향인 내 오랜 문우 김선태 시인의 강권에 가까운 권유 때문에 당신을 찾게 된 것이 당신과 그토록 오랜 인연의 시작이 되었으니까요. 우연으로 비롯되었으나 필연으로 결과 지은 당신과의 관계. 그리하여당신에 대한 그리움은 연하고질煙霞痼疾, 혹은 천석고황이 되어 때때로 나를 괴롭힙니다.
당신은 조선 팔도에서 그 무엇에게도 지지 않는 빼어난 풍모를 지녔습니다. 거기에 지성을 겸비한 당신이십니다. 어찌 내가 한눈에 혹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을 흠모하는 이가 나 하나만이겠습니까. 당신을 만나고 온 이들은 모르긴 몰라도 당신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전전반측하며 밤잠을 설치기도 할 것입니다. 흔히들 당신을 일컬어 '남도 문화 유적 답사 1번지'라 하더군요. 왜 아니겠어요. 김영랑 생가와 다산초당과 고려청자 도요지, 백련사와 수천만 평의 갯벌이 있으니 그리 불리는 게 당연지사이지요.
당신을 만나온 지 햇수로 십 년이 된 나는 만나는 이들에게 기회가 닿으면 당신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몰래 숨겨두고 나 홀로 당신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런 얌체 짓이 왠지 죄짓는 일만 같아서 그런 마음이 도질수록 외려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사가 싫어서 더욱 더 당신 자랑에 열을 올린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염려가 들기도 합니다. 당신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로 당신이 붐비게 되면 당신의 순연한 성정이 혹 모질게 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기 때문입니다.
목포에서 차를 타고 40분가량 달리면 잘 닦지 않은 유리창처럼 흐린 당신의 상반신(바다)과 양푼에 퍼온 지 오래된 시래기죽처럼 질퍽하게 풀어져 퍼져 있는(이것은 멀리서 보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가면 당신은 식은 죽이 아니라 펄펄 끓는 국으로 다가옵니다) 당신의 허리 아래(갯벌)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나는 당신의 허리 아래가 어머니의 자궁, 혹은 태아적의 양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의 허리 아래는 내게 강렬한 성적 욕망을 부추깁니다. 당신 안에 잠겨서 한 사흘 죽음같은 깊은 잠에 들고 싶습니다. 또는 들숨날숨 크게 숨 쉬고 있는, 오래 끓인 곰국처럼 걸고 진한 당신의 구멍 속으로 세발 낙지가 되어 파고들고 싶다는 본능적 충동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당신 앞에 서면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며 가랑잎같이 가랑가랑 울던 날들의, 제 깜냥으로 절실했던 청승과 신파가 다 가짜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내가 지고 가야 할 미래의 생을 빛깔과 냄새로 미리 말하라고 하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한참을 달아올라 씩씩거리던 김으로 솥뚜껑 몇 번이고 들어올리는, 한파에도 보글보글 들끓고 있는 당신의 허리 아래를 보여주겠습니다. 당신의 구멍마다 뜨겁게 몸을 담근 소라게처럼 여직 나는 비린 살 냄새를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몸에 묻은 생활의 뻘흙 말끔히 씻어낸 후에 마침내 내 생이 최종적으로 돌아갈 곳은 바로 당신의 구멍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 당신의 허리 아래에서 실패한 사랑과 다가올 사랑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언젠가 푹푹 빠지는 당신의 아랫도리(갯벌)를 맨발로 걷다가 숨어있던 모난 돌에 찔려 피를 흘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매번 당하면서도 자주 잊는 세상의 흔한 사랑의 관계 같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맨발의 상처가 아물듯 사랑도 마음에 흉터를 남기고 아물게 마련입니다. 내 맨발에는 나만 아는 상처의 무늬가 몇 겹쳐있습니다. 갯벌에 다친 맨발이 한동안 물컹하고 쫀득한 살의 유혹 멀리하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마음 또한 사랑을 한동안 멀리하고 두려워하겠지요. 그러나 또 질척한 자궁 속에는 들숨날숨의 무궁무진한 생명들이 얼마나 뜨겁게 숨 쉬고 있는 것인지요. 그것이 바로 당신의 힘인 것이지요. 그렇듯 내 다친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그날의 상처를 까맣게 잊고 다시 사랑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당신이 아프면 안 됩니다. 당신은 세상의 어머니이고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사내인 바다가 하루에 두 번(밀물과 썰물) 당신을 안아주고 가면 당신은 언제나 새로운 생명들을 잉태하곤 하였지요. 그러나 당신의 이웃 아낙들은 자궁암이나 유방암이나 백혈병이나 관절염 등의 갖은 질병으로 지금 크게 앓아대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아무리 뜨겁게 남정네들이 안아주어도 더 이상 생명들을 잉태하지 못하거나 어쩌다 힘겹게 잉태하여도 장애자들을 낳기 일쑤입니다.
내가 특별히 당신을 연모하는 까닭은 아직 당신이 충분히 젊고 싱싱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관능은 눈이 부십니다. 당신은 생명들을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잉태해냅니다. 건강한 관능미가 나를 들뜨게 합니다. 당신 앞에서 나는 건장한 사내이고 싶습니다. 바다가 그러하듯이 나도 당신을 뜨겁게 품고 생명을 뿌리고 싶습니다. 세발 낙지가 되어 당신을 파고들고 싶다가도 나는 또 뜬금없이 거친 바다가 되어 당신을 덮치고 싶은 것입니다.
세 해 전이었던가요. 당신을 만나러 간 봄에 당신의 머리맡에서 나는 뜻밖의 부드러운 풍경을 만났습니다. 그 인상적인 풍경과의 해후는 특별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입춘의 그날에 만난 것은 '보리밭'이었습니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숙였다 일어서는 보리들이 얼마나 핏줄처럼 반가웠던지 괜스레 눈물이 솟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습니다. 나는 그날의 보리밭 속에서 내 어릴 적 종다리와 황토 빛 누런 얼굴들을 떠올렸습니다. 더러는 죽고 더러는 경향각처로 흩어진, 자주 눈에 밟히곤 하는 얼굴들 말입니다. 서울의 밥집에서나 더러 만나던 보리, 시집에서만 더러 읽던 보리, 오뉴월 부릴 땡깡을 파랗게 키우고 있던 보리, 시인 한하운의 서러운 보리, 시인 서정주의 관능의 보리, 시인 함형수의 추억의 보리를 그날 보았던 것입니다. 보리 추수를 해본 사람을 알 것입니다. 보리는 베어져서도 성깔을 죽이지 않고 추수하는 소매 속으로 들어가 까칠하게 살갗을 아프게 긁어댑니다. 시골 농부의 무던한 심성 속에 숨어 있는 자존의 성깔을 닮은 것이지요. 보리밭은 당신이 나를 위해 일부러 불러들인 선물인 줄 알았습니다. 풍경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부드럽게 쓰다듬는지요. 풍경의 손길에 조용히 몸을 맡기면 마음이 고구마 순처럼 한결 순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당신과 하루해전 노닥거리다 배가 출출해지면 한사코 내 허리춤을 감겨오는 뜨거운 당신의 포옹을 슬그머니 풀고 가는 곳이 마량 포구입니다. 당신의 허리 아래를 따라 남쪽으로 차편을 이용해 20 여분을 달리면 거기, 갓 시집온 새댁처럼 수줍게 얼굴을 내밀어오는 포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 구석에 옹색하게 물러앉은 횟집을 찾아 들어가 회감을 시켜놓고 넘치는 소주잔에 노을과 바다를 타서 마시면 합격 통지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입시생처럼 세상이 다 내 편 같기만 하고 까닭 없이 마음이 들떠서 바람을 만난 배의 돛처럼 한껏 부풀어 오릅니다.
포구에 올 때마다 나는 못된 생각에 젖어 봅니다. 아마도 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못된 생각이 내 생전에 현실화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못된 생각은 더욱 애틋하고 간절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몰래 숨겨놓은 애인을 데불고 나는 소문조차 아득한 이 포구에 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갔으면 하는 것입니다.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 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에 간지럼이나 실컷 태웠으면 하는 생각에 젖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하니 먼 바다나 돌고 왔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를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을 거덜냈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사념에 젖다 보면 어느새 어둠의 홑이불이 바다를 덮어옵니다. 그러면 갑자기 갈 길이 바빠집니다. 나는 먼 곳에서 손을 흔들며 당신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크게 슬퍼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별은 한시적일 뿐이라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서로 잘 알 기 때문입니다. 한 달포나 아무리 늦어도 철이 바뀌기 전에 내가 당신을 다시 찾을 걸 당신은 진작 알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도착할 즈음 어쩌면 나는 하행선 열차에 더운 몸을 실고 있을 줄 모릅니다. 그날에 당신을 만나 그간 밀린 이야기 또 실컷 나누기로 하지요. 내 사랑 그러면 그 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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