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27
고향난망(故鄕難忘)
김현임(수필가)
‘정원은 지금 유월이 절정이다. 초록은 짙어가고 바닥엔 온통 파란 이끼다. 빨간 찔레꽃, 노란 달맞이꽃, 자줏빛 우단동자꽃, 주홍 석류꽃이 원색 점을 찍는다. 쪼로롱, 쪼로롱, 뻐꾹, 뻐꾹.... , 갖가지 새가 무성한 나무에 숨어 갖가지 곡조로 지저귄다.’ 이런 문장에 우선 놀랐다. 내 집 마당에서 펼쳐지고 있는 풍경을 그 누가 이리도 상세히 옮겨 놓았을까 싶은 느낌 때문이었다. 해남의 해창 막걸리를 소개하기 위한 글, 그 속에 등장하는 주조장 마당의 정경에 감칠 맛 나는 막걸리 묘사가 이어졌다. 만화방창(萬化方暢)한 유월마당도 그렇지만 ‘머위대나물, 마늘종장아찌에 아삭아삭 묵은 김치에 곁들여 먹는 유윳빛 막걸리는 달큰하고 상큼하다. 거목 그늘에서 온갖 새소리를 들으며 얼근해진다’는 문장에 운암(雲岩) 정 씨(鄭氏)의 시조(始祖)가 된 그, 막걸리를 누구보다 애호하는 그가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지인의 말로는 자신과 세상에서 통하고 사랑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고 했다. 그래서 내게 꼭 한 번 만나게 해주고 싶었노라 했던가. 큰 체구, 뚜렷한 이목구비에 짙은 속눈썹이 인상적이었다. 영국 태생의 파키스탄 인으 로 한국에 정착한 지 이십 년이 넘었지만 이방인 특유의 어눌한 말투였다. 어쨌든 그와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우리 셋은 의기투합했다. 마땅히 초여름 더위를 피할 곳도 없었다. 얼마쯤 두리번대다가 만난, 멀리 물이 내려다보이는 들판의 나무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기분 좋게 취했던 막걸리다.
두 사람 인연의 시작이 호주의 한 카페였을까, 영국의 하숙집인가, 어느 각박한 일터에서 서로의 신산함을 나누던 사이일까. 분명 생의 어느 험준한 길목에서 만났으리라 짐작되는 두 사람은 가끔 영어로 얘길 나누었다. 눈치로 보아 첫 상면한 나에 대한 감상평(?)이라 짐작되기도 하던. 이렇게 만난 것이 서 너 번 남짓, 하지만 어느 새 평생지기처럼 허물이 없어졌다. 외모완 달리 눈이 감기게 시어터진 묵은 김치를 즐기며 막걸리도 생산지까지 따져 가며 마실 만큼의 경지에 다다른, 정작 우리보다 더 토속적인 미각을 지닌 이방인이 처음엔 신기했다. 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한국 아버지의 부정(父情), 그 전형을 보이는 자식 사랑이었다.
“밀린 빨래, 매 끼니의 밥걱정, 반찬걱정도 그렇지만 직장 일에 파김치가 되어 퇴근한 후 싱크대에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거리를 마주할 때는 나도 모르게 가끔 짜증이 나요”
탄식처럼 뱉었다가
“그래도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만 생각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이 나와요.”
로 서둘러 정정했다.
낮에는 학원의 원어민 강사로, 밤에는 호텔의 지배인으로 동분서주 중인 그와 달리 사랑이란 명목 하에 그로 하여금 산 설고 물 설은 이국땅을 선택하게 만든 아내는 매일, 매일이 너무도 분주해 집안 살림을 건사할 틈이 없단다. 먼 후일에 있을 가족들의 천국행, 그 안착을 위해 교회에서 주님을 극진히 영접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는 그녀. 하니 등교하는 아이들 아침밥을 외면한 새벽기도에 깊은 산 속의 헌신기도처에서 보름 넘게 머무는 일도 다반사란다.
‘너희들은 모두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너무 간단하게 보지 말라. 하나님의 사역은 일반 사역과는 다른 바, 사람의 두뇌로 달할 수 있는 기묘가 아니고 사람의 두뇌로 달할 수 있는 지혜도 아니다.’ 이런 전능하신 신의 말씀으로 중무장했을 그의 아내를 그가 감히 대적하겠는가. 초기의 티격태격도 지쳐 이젠 스스로 무장해제, 그녀를 이해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접었다는 그의 얼굴에 어리는 그늘의 여운이 짙다.
가정도 사업도 곤두박질한 처지의 지인이다. 그를 마치 피붙이 형을 걱정해주듯 전화로나마 꼬박꼬박 안부를 챙겨왔다는 그 남자. 행여 상대의 마음 상할까 조심스레 자신의 신발이나 옷가지를 건네는 정(情)의 깊은 뿌리를 가진 그는 사람에 따라 맛을 탄다는 막걸리를 빼닮았다. 싸고 천하게 빚으면 싸고 천한 대접을 받기에 막걸리의 맛이 맘에 안 들면 양조장에서는 몇 말이고 그냥 쏟아 부어버린단다. 날씨에 따라, 빚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들쑥날쑥 맛이 변하는 게 막걸리라고 했다. 비오는 날이나 부부싸움 한 뒤 빚은 막걸리는 도통 맛이 없단다. 막걸리가 덜 발효돼 밋밋한 날은 택배 주문도 거부하고 싶을 정도지만 잘 익어 향이 좋은 날은 누가 찾아오지 않나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한다는 막걸리.
어떤 식으로든 균형을 잃은 삶은 위태해 보인다. 그의 심지는 굳건한데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불안하다. ‘종교적 규율의 쇠사슬을 박차고 인간으로서 본능에 충실하고 개인의 참다운 행복을 추구하고 누리는.... ’책을 읽다가 만난 이런 글귀에 가슴이 먹먹해지며 그가 또 다시 가슴에 걸렸다. 격화소양(隔靴搔癢)이라던가. 당사자는 발등이 가려운데 고작해야 신발 위를 긁어주는 격인 그를 향한 안타까움이다.
‘사람의 정은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고 잊을 수 없는 것, 이는 둥지를 떠난 새가 제 보금자리가 있던 숲을 언제나 잊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고향난망(故鄕難忘)’은 왕찬(王讚)의 잡시와 사기(史記)의 고조본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고향, 그의 눈가에 사르르 맺히는 습기의 근원(根源)이리니 며칠 전 감꽃 노랗게 떨어진 탁자에서 막걸리에 얼근하게 취기 오른 그가 말했다. 고향에서 즐겨 먹던 양고기에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이슬람식 가든파티를 내 집 마당에서 꼭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삶이란 내 곁의 아름다운 사람들과 벌이는 조촐한 잔치마당이 아닐까. ‘스리라트나 김수로(SriRatna Kim suro), 이는 인도에서 펴낸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에 관한 영문서적이라던데 머나 먼 이국에 정착해 바야흐로 한 가문의 효시(嚆矢)가 된 그와의 인연이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으랴. 그의 예쁜 딸과 잘 생긴 아들이 함께 할 그 특별한 파키스탄 식 저녁 잔치, 잘 빚은 막걸리가 어우러질 그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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