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안 오실랑가비네
눈물조차 말라 혼절해 누운 江,
이 모두 제 탓이다 자학하는
나무들의 등걸마다 시퍼런 울혈
모두가 마른 哭하는구나.
온 우주가 각출해 내민 뜨거운 정에도
달래지지 않는 부피 큰 상실감
그대의 不在
어느 새벽녘 자다 깨어 이런 문구들을 적었다. ‘그대가 강물이라면 뛰어들고 싶다. 단 몇 초간 황홀히 너를 만끽하고 담보로 내민 목숨 홀연히 쓸려 사라진대도... ’ 이런 글귀들도 적혀 있다. 당시의 갈증이 사라진 까닭인가. 출발 대기 중인 버스 속에서 꺼내 읽는 수첩 속의 글귀들은 생경하다.
이윽고 시동이 걸리고 차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헐레벌떡 뛰어 들어 내 곁에 털썩 앉으신 할머니는 ‘아이구!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시더니
“학수고대 기다린 비님이 오신다고 해서 마당에 어질러놓은 것 말끔히 치워놨더니 그 분께선 오늘도 안 오실랑가비네”
혼자소리로 장탄식을 하셨다.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순하고 따뜻한 황토 벌판에 언 강물 풀리는 소리로 입맞춤하며, 산천초목을 일일이 호명해 우리의 거친 마음까지 적신 후 마을 앞 실개천을 부풀리는 비, 그 비를 예쁘다, 예쁘다 칭송하던 시인처럼 대지의 목마름을 해소해 줄 비를 너나없이 기다리는 요즘이다. 손바닥만 한 내 밭의 열무는 날마다 주는 물에도 시들어 버린 지 오래다. 채 여물이 들지 않은 보리밭을 통째로 태우는 매캐한 연기는 자욱하고 가뭄으로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들을 보며 나 또한 극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자신의 더운 입김으로 단 한 송이 꽃을 피워낸 적 있었는지, 뜨거운 눈물로 이슬 한 방울 지상에 내린 적 있었는지 진정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우주의 사업에 동참해야 한다했는데 정말이지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祭儀(제의)인 물제라도 지내야할까. 신라 진평왕 50년 여름, 나라 전역에 큰 가뭄이 들자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서 비를 빌었다. 현종 12년에도 토룡을 만들고 무당을 모아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올렸다. 조선시대에도 무당과 판수, 내시들을 동원하여 개성대정, 백악산당, 한강 등지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이런 주술적인 방법 외에도 가뭄이나 천재지변은 목민관들의 부덕의 소치라하여 근신하며 시혜를 베풀었다고 했다. 억울하게 옥살이 한 자나, 생업이 없는 자, 四窮(사궁)인 홀아비, 홀어미, 과부, 고아들을 두루 살피고 부역을 경감하거나 어진 선비를 천거하며 탐욕과 사욕을 다스리고 과년한 남녀의 짝을 지어주었으며 잘못 쓴 묘터가 없는 지, 비가 올 때까지 기름 진 음식을 삼가며 풍악을 금했다. 즉 도처의 원망을 품은 것들을 위무하는 선행을 베푼 것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도 기우의식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도성 안 1만호의 집에서 병에 물을 채우고 거기에 버드나무가지를 꺾어 꽂았다. 그리고 관에서는 ‘오룡제’를 지냈다. 동쪽 교외에 청룡을, 남쪽엔 적룡을, 서쪽엔 백룡을, 북쪽엔 흑룡을, 그리고 중앙의 종루에 황룡을 그려 붙이고 사흘 동안 의례를 지내는 것이 오룡제란다. 도교의 술사를 시켜 경을 읽게 하고 창덕궁 후원과 경회루, 모화관 세 곳의 연못 항아리에 도마뱀을 넣고 띄운 후, 푸른 옷을 입은 동자 수십 명으로 하여금 버드나무가지로 항아리를 치며 이런 가사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게 안개를 토하여라.
주룩주룩 비를 쏟아지게 하여라. 그러면 너를 놓아주마”
그런가하면 민간에서도 기우제는 여러 유형으로 행해졌다. 전국의 산 위에서 불을 놓았다. 불 타는 소리가 천둥치는 소리 흡사하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소, 돼지, 양을 공물로 바치고 물을 관장하는 신의 노여움을 풀기위해 춤과 노래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때론 더러운 오물을 성스러운 장소에 던져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신의 화를 돋구어 그 여파로 폭포수 같은 비를 내리게 하자는 궁여지책이었다. 한 무리의 부녀자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 열을 지어 일제히 ‘쉬이’ 소리를 내며 방뇨하기도 하고,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가뭄을 가져왔다고 믿어 이를 쫓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돌, 꽹과리, 솥뚜껑, 냄비를 두드리며 비를 기원하기도 했다.
‘두 달이상의 한발이 계속되어 면화는 발아를 못하고 모자리는 모다 고사 디경에 이르럿슴으로 인심이 흉흉하여 농가에서는 이양기인 夏至(하지)만 기다리고 잇던바 하지가 지난지 일주일이 지나도 의여히 한발이 계속하며 강우할 희망이 업슴으로 흉년의 소동이 일어나며 인심이 극도로 흉흉하야 돈을 가지고도 쌀을 사먹기가 어렵게 되엇더라’
1927년 6월 30일 자 조선일보.
‘그 푸른 빛은 다 어디 가고 빼 아닌 붉은 옷을 입엇으니 至公無私(지공무사)한 대자연의 暴威(폭위)가 어떠하야 이다지도 심하던가. 수일전에는 부녀자들이 산의 분묘를 발굴하는 등 탈선행동이 성행될뿐아니라 산상에 焚火(분화)를 노하 기우제를 지내지 안흔 동리는 한마을도 없다한다. 요행히 몇 두락 심은 사람은 왼가족이 총출동하햐 주야로 물을 떠다 붓고 있다. 이 참담한 모든 현상- 그 적토에서 뿌리를 박고 사라가는 인간의 노력! 눈물 없이 어이 보랴!’
1935년 8월 18일 자 동아일보.
이렇듯 가뭄이 어제오늘 일 아니건만
“오늘도 안 오실랑가비네”
비를 그 분이라 호칭하며 오늘도 주름진 목 길게 빼고 초조하게 비 소식을 기다리실 할머니. 도회의 그대들이야 단 돈 500원이면 슈퍼에 달려가 해소하니 몇 달 가뭄 쯤 그대들 피부에 와 닿지 않겠지. 하지만 그대들 역시 요 근래 부쩍 마음의 갈증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유순한 밭처럼 촉촉이 젖고 싶어서, 폭우처럼 내리쏟는 情의 빗물에 듬뿍 젖고 싶어서 새벽녘 불현듯 깨어 이런저런 문구들을 나처럼 끄적인 적 없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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