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25
김현임(수필가)
포진천물(暴殄天物)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사건으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상대 여성의 허리를 만졌느냐, 엉덩이를 건드렸느냐를 두고 진실공방도 뜨거웠다. 청와대 대변인이란 귀한 자리다. 아무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그런데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나라 세금으로 국익을 위해 나선 해외나들이에서 술 취해 추태를 부린 고위 공직자의 처신이 새삼 부끄럽게 다가오며 떠오른 사자 성어가 ‘포진천물’이다. 귀한 물건이나 재능을 아무렇게나 아까운 줄 모르고 허비해버린다는 뜻이다.
학문이라든가 재주는 쉽게 터득할 수 있으나 하늘이 주신 성품, 그 천품(天稟)을 가다듬어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리는 인격도야(人格陶冶)는 이토록 어려운 것인가. 연산군 시절 유자광이 그렇다. 그는 재주라든지, 용기라든지, 일을 추진하는 능력이라든지, 뭐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유학의 이론을 말하는데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조예가 깊었고 글도, 활쏘기도 말 달리는데도 남에게 양보하라면 서럽다할 재주를 지녔다. 다시 말하면 누가 뭐래도 문무겸비의 특출한 인재였다. 그런 그가 역사 앞에 영원히 부끄러운 행적을 저지른 인물로 남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세조 때 유자광은 강순, 남이와 함께 북쪽의 야인 정벌에서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런데 강순과 남이는 원훈(元勳)이 되고 유자광은 차훈(次勳)이 되었다. 가장 큰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특별한 배려 덕택이 아니었으면 그 조차도 불가능할 뻔했다. 유자광의 신분이 문제였다. 그는 첩의 아들, 당시 사회제도가 서자(庶子)는 넉점박이라고 천하게 여겨 하늘에 올라가 별을 따는 재주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자광은 이런 불합리한 사회에 대해 점차 불만, 불평을 품게 되었다. 갈수록 팽배한 반항심과 복수심으로 그를 표출할 기회를 벼르게 된 것이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군사경험도 많은 강순이야 그렇다 치자. 남이는 겨우 약관의 나이에 재주도 별 볼 일 없다. 다만 남이는 빼어난 문벌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남이는 태종의 외손자, 또한 세조를 도와 혁명에 성공한 권람의 사위가 아닌가. 더구나 남이는 유자광을 평소 짐승처럼 천대했다.
남이가 쓴 ‘백두산정의 바위로 칼을 갈고....’로 시작되는 한 편의 시가 좋은 빌미가 됐다. 또한 하필 남이가 대궐에서 숙직을 할 때 나타난 혜성(彗星), 모두가 불길한 징조라 걱정을 하였지만 ‘옛 것이 없어지고 새로운 일이 벌어질 기상이다(除舊布新之象)’고 한 남이의 발설을 물고 늘어졌다. 드디어 눈엣가시인 남이를 처단한 공으로 얻은 정란공신(靖亂)功臣)의 작위지만 그 일로 말미암아 유학의 거두인 김종직과도 날 세운 대립을 하게 된다. 골수 선비인 김종직의 눈에 비친 유자광의 행위야말로 비열함 그 자체였다.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이 학사루의 누마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를 떼어낸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유자광은 김종직을 비롯해 유학계 전체에 앙심을 품게 된다.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엿보던 유자광은 이번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 삼았다.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죽인 일을 조롱한 글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미 죽은 후인 김종직은 물론이요, 그 문하의 유학자들이 혹화(酷禍)를 당하는 무오사화의 주범이 된 유자광이다.
주인의 명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드센 종이 호노한복(豪奴悍僕)이라던가. 하늘의 명인 운명에, 자신의 분복(分福)에 만족하지 않고 반발을 꿈꾸다가 맞는 호된 회초리를 어찌 피할 수 있을까. 자신의 특출한 재주에 교만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결핍에도 결코 주눅 들지 않는 삶을 꾸린, 이런 철저한 자기관리 능력은 위대하다고 불리는 이들의 삶의 전형이었다. 회의주의자이자 사색가였던 카잔스키는 ‘무엇이 본질인가’를 항상 고민했던 작가였다고 한다. 소설 외에도 카잔스키는 기행문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기행문은 ‘어딜 갔다’가 아니라 ‘어디서 무슨 생각을 했다’가 핵심이었단다. 한 예로 그의 스페인 기행문을 보면 알람브라 궁전에 대한 묘사는 없고 거기에서 받은 느낌만 얘기한다.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그 나라의 정신, 박물관, 사원, 도서관을 보려 했다는 것이 남다르다.
사람의 발은 손 못지않게 섬세하고 정밀한 조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스물다섯 개의 뼈와 열아홉 개의 근육, 백아홉 개나 되는 인대를 가지고 있어 걸을 때 밑에서 올라오는 충격을 견디고 몸 균형을 잡는다. 감각 또한 예민해서 아무리 뭉툭하게 생긴 발이라도 금세 이물질을 알아차린다. 신발 안에 모래알이라도 들어가면 금세 알아차리는 것이 그 까닭이다. 하여 서양에서는 일상의 불편함을 ‘신발 안 돌멩이(Stone in my shoe)'에 비유한다고 한다. 이력(履歷)이란 신을 신고 걷는 개인의 행적을 말하니 그 누가 자신의 신발 안에 들어온 불편한 돌멩이를 참고 견디며 최종 목적지까지 이르렀느냐의 기록이 아닐까.
새 대통령의 첫 외교 무대에서 벌어진 불미스럽고 몰상식한 처신으로 인해 국제적 망신살이 뻗친, 신문에 도배되다시피 한 그 불유쾌한 기사를 피해 건너뛰듯 읽어 내리는 활자 사이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스키의 작품과 사상을 알리기 위해 결성된 ‘국제 카잔스키스 친구들’이라는 모임에 관한 기사가 반갑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105개국에 지부가 있고 총 회원 수는 5000여 명. 이는 넉 달에 한 번씩 ‘크레타의 시선’이라는 책을 발간하지만 책을 팔아 인세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해외행사 참석도 철저히 자비를 원칙으로 한다는 그의 마니아 모임 회원들 성향은 그들이 추종하는 작가와도 닮았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귀한 재주를 낭비하는 즉, 포진천물(暴殄天物)의 무리들 속, 평범한 이들의 작지만 큰 행적이 우리를 더욱 감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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