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김현임(수필가)
세상길 터벅터벅 걸어가며 만드는 제 몫의 역사, 그 世路에서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마주친 인연들이 남기는 크고 작은 波紋들, 그를 헤아릴 때마다 떠오르는 서머셋트 모옴의 ‘달과 6펜스’라는 소설 제목이다. 한 사람의 人品이 남긴 고운 향내로 하여 가슴이 훈훈해지는 귀한 경험이 휘영청 해맑은 달에 해당된다면 6펜스는 장사치의 땀내 밴 퀴퀴한 악취 풍기는 紙錢처럼 상 찌푸려지는 악연의 흔적일 터, 그로 인한 극심한 피해의 산물인가. 무심코 스치는 거리의 얼굴마다 고약하기 짝이 없는 그 사람인양 착시를 일으키는 증상에 시달리는 요즘이다.
피 말리는 작업이라고? 말들은 그렇게들 하지만 다른 노동에 비해 글 쓰는 작업은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고료 없는 원고가 수두룩한 것도 한 예, 가난은 문인들의 숙명이라고 까지 할 정도이니. 문단의 말석에서 글이나 쓰며 근근이 살아가는 무명의 여자라고 우습게 봤나? 자신이 속한 직업군을 단체로 모독했다는 이유로 저명하신 의원님과 한 코미디언과의 명예훼손 소송 해프닝에서 남발되던 ‘고소’라는 단어, 나 또한 그 ‘고소’라는 낱말이 머릿속을 휘돌았다. 중간 소개자인 시인이자 교수님과의 세월이 스무 해, 그렇다고 하더라도 애초 생면부지의 사람을 무작정 믿은 내 잘못이 크다. 하긴 명색이 대학교수, 하니 지위가 주는 사회적 신뢰감을 내 어찌 무시하겠는가. 하필 이런저런 원고가 밀려 바쁜 와중이었고 파격적으로 헐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온갖 해독불가의 그림과 한문투성이 책의 정서를 흔쾌히 받아들인 건 ‘정통이기풍수’, ‘육경풍수’라는 호기심 자극하는 책의 제명과 전액 일시불 선 지급해 주겠다는 조건, 작업 완료 후 얼마간의 추가 보수라는 제안에도 있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내세운 ‘이후로도 끊임없이 주어질 이런 작업, 그 긴 인연의 시작’이라는 조건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紙製敎라던가, 館閣文人, 규장각의 抄啓文臣 등등, 글 쓰는 일에 종사한 옛사람들의 신분, 그것은 언제나 내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글을 써서 최소한의 생계를 꾸릴 수 있다면, 글을 써서 헤이즐럿 커피를 사고, 오래 벼르던 책을 사서 읽으며, 그 중 몇 푼을 쪼개어 비축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대접할 밑돈으로 삼을 수 있다면.... . 언젠가 꼭 그런 날이 오리라 기대하며 주변에서 의뢰하는 온갖 잡글(?)들을 묵묵히 써오던 나다.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삼복더위를 무릅쓰고 노트에 휘갈긴 글씨, 생소한 어휘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빼곡한 문서작업과 흡사 해독 불가능한 상형문자에 암호 닮은 복잡다난한 그림들, 게다가 각 권 책들의 부피는 또 얼마나 두꺼운 지. 팔목 인대가 늘어나는 반 년 넘은 대 작업이었다. 어쨌든 그런 악조건들을 다 감수하고 결정한 사항이니 그런 불평은 꿀떡 삼켜야 할 입장이지만 이런 글까지 쓰며 투덜거리는 건 상대의 무성의 넘어선 안면몰수적 행위에서 기인한다.
선대금 완불을 약속한 날짜가 한 달을 훌쩍 넘도록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때 마침 한가위 대 명절 무렵, 망설이다 두 달 여가 넘어서 건 조심스런 전화에 조만간 만나서 식사나 함께하자며 얼버무렸던가. 이후 전화는 받지도 않았다. 답답함에 보낸 몇 번의 전화메세지에 대한 답변도 없었다. 그의 책 속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묘 속으로 들어가 버렸을까. 집안일조차 팽개치고 여타 다른 일을 접고 딸과 함께 하루 일곱 시간씩, 반년 넘게 매달린 고달픈 작업의 완료 후 무반응인 상대에게 슬그머니 화도 났다. 약속불이행도 그렇지만 참을 수 없는 건 묵묵부답. 듣지 않은 데에선 나랏님도 욕을 하는 식대로 내 입에서 절로 나오던 ‘이런 나쁜 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단단히 벼루기 몇 번이던가.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이런 경우엔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해야 할 지도 속수무책, 글에 매달린 세월 스무 해 넘도록 처음 맞은 일이라 황당무계하기만 했다. 만사를 내팽개치고 매달린 힘 든 노동의 대가를 떠나서 인간적 신뢰를 져버린 데 따른 정신적 피해도 만만찮아 습관처럼 잠을 설친 새벽녘, 만 천하에 터트리는 고발도 불가하리라는 생각도 스쳤다.
그러다 궁여지책, 글을 완성해 꼬박꼬박 상대에게 보냈던 전자메일이 생각났다. 결국 메일을 통한 강력한 항의 후에야 겨우겨우 대금약속일을 받아내었다. 그 모월모일에 이르기까지의 나의 날마다는 수치심과 모욕감에, 화끈거리는 가슴통증으로 시달렸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만남, 상대는 만나기 무섭게 연락두절에 관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간추리자면 잇따른 사업실패로 인해 자신에게 찾아온 갖가지 병 , 그리고 내게 맡긴 책의 발간을 맡기로 한 후원자의 재정지원의 악화, 이제 윤달이니 이런저런 풍수작업의뢰가 밀려 올 것이니 좀 더 기다리며 참아달라는 요지였다. 그동안의 신뢰감 상실에 따른 고통을 들며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태도를 돌변 책 속 숱한 그림들을 연필작업으로 새로 해주란다.
그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억지다. 애초 작업을 맡기 전, 내 쪽에서 그림 작업의 난색을 표하자 그거야 스캔으로 그대로 옮겨주면 된다던 그가 아니었던가. 자신의 말대로 전문가인 자신조차 정확도를 장담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형태의 그림, 그 세밀한 작업을 비전문가인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더군다나 여자인 내가 그 숱한 그림을 자신 곁에 바짝 앉아 일일이 점검 받아 가며 진행해야 되는 작업, 하니 자체가 절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마침내 전직 경찰이었다던 그와 그 집 주소가 있는 관할경찰서에서 마주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런 저런 상황들을 한 겹 버선 속이라 뒤집어 보일까. 어쩔 수 없이 대금약속을 한 메일과 오고 간 전화메세지가 두툼한 증거 자료로 첨부됐다. ‘어째서 9월 중순으로 대금 일시불 지급을 약속했습니까?’묻는 경찰에, 세상에나 ‘아, 그것은 그때까지 작업을 마쳐주겠다고 해서입니다.’라는 뻔뻔한 대답을 했다. 헐한 가격 대신 전액 선지급해 주기로 약정한 자신의 말은 입도 뻥긋 안했다. 대신해 1년 넘게 걸리는 작업을 내 쪽에서 한 달 반 만에 완성해주겠다 장담했다니?!! 이야말로 神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 뿐 아니다. 세 권 모두 완성해 송부한 이메일 자료가 엄연히 저장되어 있는데 1권 작업 밖에 안 해 주었다는 억지 주장 등등의, 숱한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늘어놓는 그를 그저 아연실색 쳐다보고 있어야하는 억울함이라니! 우리 모녀가 하루 종일 매달려 지난 7개월 동안 완성한 ‘정통이기 풍수 1권’, ‘정통이기 풍수 2권’, ‘육경풍수’라는 제명의 3권의 책, 총 1500페이지의 두꺼운 한문책자가 휘리릭 스친다.
‘의심이 가는 사람에겐 처음부터 일을 맡기질 않고 한 번 일을 맡겼으면 끝까지 믿는다’는 게 국내 굴지 재벌가의 人才運用 원칙이었다. 또한 疑心如暗鬼라, 무언가 큰일을 도모함에 상대를 의심해서는 결국 일 자체가 무위로 돌아가는 건 당연하다고도 했다. 큰 信心이 서로 합심하는 자리에는 온 우주의 瑞氣가 응집해 작용하기 때문이란다. 한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친척의 보증을 선 게 잘못 되어 서른 해 전 2000만원이라는 거금의 돈을 고스란히 물어주었다는 지인의 억울한 얘기도 스쳐갔다. 그 분 역시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나게 만들던 분통에 숱한 불면의 밤이 이어졌고 가슴 응어리는 갈수록 커지는 증상에 시달리기 몇 해, 그래서 전생에 그에게 큰 빚을 졌다 포기하며 가까스로 울화를 잠재웠다는.
달도 중요하고 6펜스도 거부할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길이다. 그 길에서 만난 내 최초의 訟事는 해결의 전망조차 불투명하다. 하지만 진실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걸 나는 믿는다. 더불어 글이란 걸 업으로 사는 글쟁이들은 매사 조심하고 각심할 일이다. 이런 사이비들이 설치는 世路에서 제발이지 억울하게 휘말리지 말기를. 또한 이글을 빌어 자칭 교수이자 풍수학자라는 분에게도 엄히 충고한다. 당신이 책 속에서 주장했듯 생은 한 번 다녀갔다고 다 끝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報恩과 報應의 절차는 치러지리니 남의 묘자리, 건물 자리, 운세 봐주기에 앞 서 자신의 머리에서 가슴까지 단 30센티도 안 되는 거리, 본인의 마음자리나 꼼꼼히 굽어 살펴보시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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