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향월촌 19 > 비빔국수 / 시와 산문 / 박부민 시인
비빔국수
망향비빔국수 집에서세월이란 그런 것눈 내려 지우고또 내려 덮이듯새로이 시작되는 길목에서먼 본향을 그리며한 사발의 국수를 음미하다문득 눈물 머금어도 좋으리삶이란 이런 것무어 그리 허덕일 일이던가앞 강물 내려다보며 조용히달콤 매콤한 면발을 비비자사랑하고 부대끼며 한 번 더 비비자아, 차갑고도 뜨거운 그 무엇이끝없는 흰 눈발이빈속에 진득이 들어찬다비빔국수여 이 추운 세상에서이젠 네가 제대로 살맛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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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보내는 끝자락. 언젠가 강가의 비빔국수 집에서 세밑을 맞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유독 사연이 많았던 그해를 돌아보며 창밖에 내리는 눈발에 그만 눈물이 솟구치고 말았다. 국수를 비비고 또 비비며 내가 눈발을 먹고 있는지 면발을 먹고 있는지 아니면 눈물을 마시고 있는지 분간이 안 되는 순간이었다. 식후에 그 자리에서 시를 끼적였다.
카타르시스였을까. 흘러온 굽이마다 매콤한 고통과 부끄러움과 아쉬움, 시원하고 달콤한 일들이 함께 버무려진 그것이 인생의 참맛이라는 놀라울 것 없는 생각을 새삼 품게 되었다. 봄날의 단비와 여름의 따가운 햇살, 폭우와 태풍 그리고 가을의 풍성한 열매들, 빈 들판 같은 아픈 가슴을 지우는 함박눈의 겨울까지.. 슬픔과 기쁨이 비벼진 한 해의 추억들을 삶의 갈피 속에 소중히 간직해두고 일몰의 들판에 서서 깊이 흐르는 강물을 따스하게 바라본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모두들 자기 앞의 등불을 소담히 켜는 시간. 이처럼 뜨거운 삶의 자세가 어디 있겠는가. 이처럼 차가운 지혜의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 허덕이며 안달하며 일희일비 살아온 나날들을 조용히 떠나보내고 어디선가 비빔국수처럼 진득하게 들러붙는 새로운 소망의 흰 눈발에 다시 눈시울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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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부민 시인 / 1996년 계간 <시와산문> 신인상 당선 (조병화 시인 選) 2005년 한국크리스챤문학상 수상. 시집『등불이 있는 마을』(시와문화 2010) 현 남도햇빛교회 담임목사 nasaret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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