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복의 꿈
꼭두새벽부터 쌀가루 같은 가랑눈이 얌전하게 내렸다. 어제까지 그악스럽게 횡횡하던 삭풍은 잠잠했다. 며칠 동안 푸나무들을 흔들면서 사납게 불더니 제풀에 꺾였다. 가랑눈은 아침 해가 뜨자마자 오는 둥 마는 둥 여우눈으로 바뀌었다. 손이 곱을 정도로 추운 날씨였지만 그래도 거친 삭풍이 없으니 활쏘기 연습은 할 수 있었다. 향리의 아들 정온이 별채 방 앞에서 말했다.
“눈이 그짓말멩키로 오그만이라우.”
“오늘은 오전만 쏴야겄다. 대구소 가는 날인께.”
“큰 가마집 성도 가지라우?”
정온은 정 족장의 집을 ‘큰 가마집’이라고 불렀다. 마을에서 가장 큰 토기가마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집의 가마는 높이가 낮아 안으로 들어가서는 기어 다니다시피 했지만 규모가 큰 정 족장의 집 가마는 허리만 조금 숙이면 되었고, 무엇보다 쌀독 같은 대형항아리 등을 구울 수 있었다.
“정년이와 항시 같이 댕기다 본께 인자 성제멩키로 돼부렀다.”
“아부지께서도 그랬어라우. 바늘허고 실 같다고라우.”
“하하하.”
“몬자 가서 활터 눈을 치우고 있을께라우.”
“해가 떴응께 곧 녹아불겄다야.”
정온은 활터로 먼저 갔고. 궁복은 벽에 걸어둔 활을 내려 활줄을 몇 번 당겨보았다. 겨울에는 활줄이 수축되어 더 팽팽했다. 활통에 화살도 연습용으로 챙겨 넣었다. 화살은 삭풍 이 심해 습사(習射)를 못한 날에 묵은 시누대로 만들어놓은 것들이었다.
활터는 마을 위 양지바른 곳에 있었다. 활터의 사대와 과녁 둘레는 정온이 싸리비질을 해 언 땅바닥이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사대와 과녁 사이에는 살짝 덮인 살눈이 그대로 있었다. 궁복이 활에 화살을 얹었다.
“온아, 잘 보그라. 니는 아직 팔뚝심이 읎응께 요로크롬 과녁 우를 보고 쏴야 헌다.”
궁복이 활줄을 잡은 팔의 힘을 빼고 과녁을 향해 쏘았다. 그러자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느리게 날아갔다. 관중(貫中)은 안 됐지만 과녁의 가장자리를 가까스로 맞혔다. 과녁 한가운데를 맞히는 것을 관중이라고 했다. 어린 정온을 배려해 사대와 과녁의 거리를 조금 좁혀 놓았지만 궁복도 매번 관중하지는 못했다.
“인자 온이 쏴보그라.”
“과녁이 가차와도 에러워라우.”
“이삼 년 후가 되믄 니도 어른덜허고 겨룰 수 있을 거다.”
정온은 궁복의 격려에 신바람이 났다. 아버지 향리 정씨는 서라벌에 갔다가 몇 년 만에 돌아오고 말았지만 자신은 이름을 날리는 무장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 정온은 어린 나이답지 않게 습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궁복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하루 한 차례씩 활쏘기를 끈기 있게 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에도 습사를 하려고 나섰다. 그만큼 집중력이 뛰어났다. 습사가 끝나면 궁복에게 이런저런 질문도 많이 했다.
“올 시안을 지내고 활쏘기대회에 나간담시로요?”
“시합에 나갈라고 니 집에 살고 있제.”
“아부지가 그라신디 거그서 우승허믄 군사가 되고, 또 서라벌에 갈 수도 있다고 허든디 사실인게라우.”
“맞는 말씸이여. 뭣헐라고 물어보냐?”
“지도 이삼 년이나 삼사년 후에는 참가헐라고라우.”
“참가헌 뒤에는?”
“서라벌에 가서 무장이 되야지라우.”
“온이는 시방 습사허데끼만 계속 헌다믄 꿈을 이룰 수 있을 거 같다야.”
“근디 아재 꿈은 뭣인게라우?”
“치소 시합에서 우승허는 것이제.”
“군사가 될라고라우?”
“당장에는 고것이제. 근디 굶주리는 사람덜까정 구헐라믄 군사가 되는 것만으로는 안 될 거 같다야. 정년이 아부지를 본께 토기장사를 아조 잘허고 사시드라.”
“그라믄 아재도 토기장사가 꿈인게라우?”
“비빌 언덕이 읎는디 맨손으로 뭣을 해보겄냐. 일단 내 입부터 해결허고 그 다음 생각을 해볼란다. 정년의 집에 여러 사람덜이 밥 시끼 걱정읎이 묵고 살든디 그게 좋아 보이드라.”
궁복의 꿈은 미산포에 온 뒤로 변했다. 당장의 목표는 탐진현 치소의 군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뒤에는 정년의 집에서 보았던 것처럼 장사를 잘해서 여러 사람들을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이 궁복의 꿈이었다.
해가 눈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리자 여우눈이 그쳤다. 어린 정온은 손이 곱아 활줄을 잡아당기는데 애를 먹었다. 궁복이 정온의 손가락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온아, 오늘은 그만 허자. 니 실력이 많이 늘어분 것 같다야.”
“날이 추와서 손구락을 구부리기도 심들 그만요.”
정온은 10순 중에 반쯤을 과녁에 명중시켰다. 활을 쏘는 자세와 집중력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궁복은 늘 정온의 태도에 만족했다. 정온은 싸락눈이 내리는 날에도 군소리 없이 활쏘기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어느 새 하늘은 온통 시래기 빛깔로 변해버렸다. 천태산 산자락들이나 활터는 어둑한 산그림자가 드리운 듯 음음했다.
궁복은 점심 끼니 직후 정년과 함께 대구소로 향했다. 말고삐는 정년이 잡았다. 정년의 집에서 기르는 말이었다. 말은 두 사람을 태우고도 전혀 힘들어 하지 않았다. 산길을 겅중겅중 잰걸음으로 나아갔다. 응달 산길에서 한 번 헛디뎠을 뿐, 튼실한 말은 힘이 넘쳤다. 대구소가 보일 즈음에야 정년이 말했다.
“성님은 검술도, 승마도 타고 났어라우.”
“뭣이라고? 무재를 타고 난 사람은 동상이여.”
“지가 헌 말이 아니어라우. 향리 어르신께서 탐진현에서 살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라고 허드라고요.”
“여그서도 살기 심든디 내가 으디로 가겄는가?”
“지는 서라벌로 가고 잪어라. 성님도 같이 가지라.”
“서라벌에서 출세헐라믄 줄이 있어야 허는 것이여.”
“긍께 실력으로 버텨야지라, 개천에서 용 난다고 허드그만요.”
“진골, 성골이 판치는디 그 틈바구니를 어처케 파고들겄냐? 향리 나리께서도 서라벌에서 애만 쓰다가 돌아오신 거란 말여.”
“성님, 그래도 지는 서라벌에 가볼라요. 성님은 여그서 토기장사허고 잪은 모냥이지만.”
“동상은 내 맴을 환히 보고 있그만잉.”
“하하하. 지는 성님 오장육부를 다 보고 있지라.”
대구소 검술훈련 공터에는 마을 장정들이 삼삼오오 화톳불을 피워놓고 곱은 손을 녹이고 있었다. 말에서 먼저 내린 궁복이 그들에게 다가가 한 마디 했다.
“불을 꺼불게. 나리께서 보시믄 야단을 치실 텐께.”
“알겄그만요.”
장정들은 궁복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작년 늦가을 활쏘기대회에서 1등을 한 데다 체구가 그들을 압도했으므로 아무도 어깃장을 놓지 못했다. 검술훈련 공터에는 갈대로 엮은 사람 형상의 허수아비들이 세워져 있었다. 칼을 휘두를 때 실전처럼 훈련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허수아비들이었다.
대구소 향리는 장정들에게 직접 검술을 가르쳤다. 그 이유는 탐진바다까지 들어와 노략질하는 당구들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당나라 해적인 당구들은 계절풍을 타고 몰래 잠입해 바닷가 사람들을 납치해 가거나 분탕질을 했다. 바닷가에서 갯것으로 연명하는 보자기들의 피해가 컸다. 붙잡힌 뒤 당인(唐人)들의 노예로 팔려가기 일쑤였던 것이다.
재작년의 봄이었다. 당구들이 대낮인데도 탐진바다 깊숙이 미산포까지 들어왔던 것이다. 미산포 별장이 기지를 발휘해 당구들을 격퇴했던 사건이었다. 그때 대구소 향리에게 무술훈련을 받고 있던 마을 장정들이 급히 나섰는데, 당구 배 세 척이 미산포에 닻을 내리려다가 도망쳤던 것이다. 별장의 용의주도한 작전의 결과였다. 별장은 검술 훈련용 허수아비들을 가져오게 했다. 그런 뒤 활처럼 구부러진 미산포 양쪽에 경계군사처럼 세우고서 당구들을 미산포 안쪽으로 유인했다. 별장은 두 척의 돚배에 장정들을 잠복시키고 나서는 당구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별장이 장정들에게 신신당부했다.
“내가 불화살을 쏠 때까정 아무도 화살을 쏘지 말어야 헌다잉.”
“예, 별장님.”
예상한 대로 당구들은 허수아비들이 군사들인 줄 알고 그쪽을 피해서 미산포 안쪽으로 한 척씩 들어왔다. 별장은 당구의 배 한 척이 돚배 가까이 접근하자 불화살을 날렸다. 그러자 선두의 당구 배가 뱃머리를 돌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별장이 또 불화살을 당겼다. 그러자 선두의 당구 배에 불이 붙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계절풍인 마파람에 불이 돛으로 옮겨 붙더니 불길은 순식간에 당구 배의 이물과 고물로 번졌다. 당구들이 배에서 뛰어내리자 오른쪽의 돚배에 타고 있던 장정들이 쫓아가서 화살을 날렸다. 왼쪽의 돚배에서 칼을 들고 있던 장정들은 살려고 허우적거리는 당구들의 목을 쳤다. 미산포 바다에 핏물이 번졌다. 그제야 두 척의 당구 배는 탐진바다 너머로 도망쳤다.
별장은 돚배를 타고 싸웠던 장정들을 점고했다. 사상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사기가 오른 장정들은 별장에게 하소연했다.
“별장님, 쫓아가서 해적덜을 모다 읎애부러야 했는디 아숩그만요.”
“우리덜이 당구덜을 격퇴헌 것은 천운이여. 아숩드라도 으쩌겄냐. 당구덜은 백병전에 능헌께 숫자가 열세인 우리가 추격했다가는 되치기를 당헐 수도 있는 것이여.”
“별장님 아니믄 우리가 어처케 싸울 수 있겄습니까요. 별장님 공이 젤로 크지라우.”
“당구덜이 밤에 또 올지 모른께 오늘은 긴장허고 있어야 써.”
“그럴께라우?”
“배 한 척을 잃어부렀은께 보복헐라고 올지 모른께.”
별장의 지시에 따라 장정들은 미산포를 떠나지 않고 경계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탐진현 치소에 출장 갔던 대구소 향리가 오후 늦게 미산포를 찾아와 별장을 격려했다.
“별장, 큰일 날 뻔했그만. 큰 상을 곧 내리겄네.”
“향리 나리께서 평소에 장정덜을 불러 모아 훈련을 시킨 덕분이그만요.”
“서라벌 왕실에 보낼 토기덜이 미산포 창고에 가득 쌓였는디 참말로 다행이네.”
초저녁에는 정년의 아버지 정 족장도 미산포로 달려왔다. 대구소 향리에게 정 족장이 감사를 표했다.
“동상, 참말로 고맙그만. 근디 당구덜이 알고 왔을까?”
“족장님, 창고에 토기덜이 있는 줄 알고 왔는지도 모르겄소. 별장이 그런디 해적덜이 미산포를 환히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다고 허드라고요. 잡혀간 보자기덜이 알려줬겄지라.”
“향리 동상, 어차든지 내가 장정덜에게 특식을 내겄네.”
“성님은 그럴 만허지라. 창고에 있는 토기덜이 대부분 성님 가마에서 나온 것인께.”
“맞네. 별장이나 장정들에게 뭣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네.”
“경상도 해안에 왜구덜이 아조 가끔 나타난다고 허요. 허나 배도 시원찮고 뱃길도 모르는 왜구덜이 여그까정 오기는 아직 멀었지라. 당장의 골칫거리는 우리 바다에서 도적질허고 댕기는 당구덜이지라.”
향리 말대로 그때까지만 해도 왜구들이 탐진바다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왜구들에게는 탐진바다까지 올 만한 배도 없었고, 북극성이나 별자리를 보고 항해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탐진 사람들은 왜구들에게 없는 큰 풍선(風船)에 토기를 싣고 흑수(黑水)나 황수(黃水)바다를 자유자재로 다녔다. 그만큼 항해술이 뛰어났던 것이다. 장사하는 정 족장 같은 사람도 흑수바다를 건너 당나라까지 다녀온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윽고 대구소 향리 정씨가 검술을 가르치기 위해 나타났다. 향리는 초보 장정들에게 목검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그런 뒤 정년이 초보 장정들을 기본자세부터 반복해서 훈련시키도록 했다. 정년은 초보 장정들을 야무지게 다잡았다.
“검술의 기본은 상하로 내려치기 허는 것이여. 목검을 머리 우로 올렸다가 땅바닥으로 번개치데끼 빠르게 쳐야 써!”
향리는 겨우내 훈련해 온 궁복과 두 명의 장정들에게는 실제로 긴 칼을 들게 했다. 향리 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갈대로 만든 허수아비는 눈 깜작 할 사이에 양 팔부터 베어지고 목과 배가 잘려나갔다. 칼에 벤 자리는 지저분하지 않고 깔끔했다.
“검술은 속도여. 능헌 고수일수록 속도가 빠르제.”
정년은 초보 장정들을 가르치고 난 뒤에야 칼을 들고 허수아비를 베었다. 향리는 정년과 궁복의 칼솜씨를 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큰 체구에서 나오는 힘이 남달랐다. 칼을 휘두르는 순간 휙휙 바람소리가 났다. 향리 정씨가 궁복에게 칭찬의 말을 했다.
“활 못지않게 칼도 잘 다루네 그랴. 쬐끔만 더 훈련허믄 탐진에서는 겨룰 자가 읎을 것이네.”
“나리 덕분입니다요.”
“궁복과 정년이 있는 한 당구 걱정은 헐 필요가 읎겄네.”
“나리께 배운 검술로 반다시 탐진바다를 지키겄습니다요.”
“나는 이미 늙어가고 있네. 젊은 자네덜이 당구가 출몰허지 않는 깨깟헌 탐진바다를 맹글어주게.”
궁복은 탐진바다를 깨끗하게 해달라는 향리 정씨의 당부를 가슴에 담았다. 허수아비를 또 베고 나자 이마에 땀이 솟았다. 정년도 마찬가지였다. 땀을 닦으며 정년이 말했다.
“성님, 깨깟헌 바다를 맹글어달라는 향리 어르신 말씸이 찡허그만요.”
“동상, 나도 그러네. 깨깟헌 바다란 다른 말로 허믄 청해여.”
궁복은 몇 번이나 청해(淸海)란 말을 중얼거렸다. 탐진바다뿐만 아니라 가리포바다도 청해가 되기를 바랐다. 사실 가리포바다는 탐진바다보다도 당구들이 더 자주 출몰하는 곳이었다. 당구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 아직도 생사를 모르는 가리포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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