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다산의 1호 제자 치원 황상이 사숙한 ⌜한유(韓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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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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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1호 제자 치원 황상이 사숙한 ⌜한유(韓愈)⌟

다산의 1호 제자 치원 황상은 중국의 유명한 4대 시인, 즉 육유, 한유, 두보, 소식의 시를 익혔으며 특히 장자를 섭렵하였습니다. 추사는 치원의 시를 감상하고 나서 두보와 한유의 시를 골격으로 삼았다는 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 공부를 통해 황상시를 탄생시켰기에 본지에서는 5회에 걸쳐 치원이 등초하고 초록했던 4대 시인과 장자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연재합니다.

 

봄에는 장자를 등초하였고

가을엔 육유 시를 초록하누나

천여 수를 손으로 써서 얻으니

눈이 컴컴해 온통 감길 것 같다

 

<한유의 문학적 성취>

한유(韓愈, 768~824)는 성당(盛唐)시대에 태어나 중당(中唐)시대를 살았던 정치가요 사상가이기도 하지만 문인으로서 그 이름이 더 높은 문장가이자 시인이다. 한유는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중국 산문사를 대표하는 문장가이다. 소식(蘇軾, 1037~1101)은 한유를 이렇게 평했다.

문장은 팔대 동한(東漢) () () () () () () ()의 쇠미한 문풍을 일으켜 세웠고, ()는 천하의 사람들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단에서 건져내었다

한유의 고문운동과 유학부흥을 평가한 말이다.

한유는 문과 수양의 관계에 대해 그 뿌리를 길러 열매를 기다리고, 기름을 더하여 불빛의 밝기를 바라야 한다. 뿌리가 무성하면 그 열매가 풍성하고 기름이 넉넉하면 그 빛도 밝다. 인의를 갖춘 사람은 그 문장이 매끄럽고 부드럽다고 하면서 좋은 작품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내면적 수양, 즉 유가의 도를 수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유는 문기설(文氣設)을 주장했는데, 맹자의 호연지기와 조비(曹丕)문은 기세를 위주로 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문장의 기세는 물과 같고, 문사는 물에 뜨는 물건과 같다. 물이 많으면 물 위에 뜨는 것이 크든 적든 모두 뜨게 된다. 문장의 기세와 문사도 이와 같아서 기세가 성하면 어구의 장단(長短)과 성운(聲韻)의 고저(高低)가 모두 적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장을 지을 때는 진부한 표현은 힘써 없애야 한다(陳言務法)’ ‘문사는 반드시 자신에게서 나와야 한다(詞必己出)’라고 하여 언어의 독창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언어를 표현함에 있어서 문장은 문맥이 순통하도록 글자를 운용해야 한다(文從子順)라고 하여 문장의 자연스러운 표현을 중시하기도 했다.

한유는 자신의 문학 이론 가운데 문학창작이란 작가의 마음 속애 억제할 수 없는 감정, 즉 불평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라는 불평즉명(不平則鳴)설을 제기하였다.

 

대개 만물은 평온한 상태를 얻지 못하면 운다. 풀과 나무는 본래 소리가 없는 것인데 바람이 흔들어서 소리 내어 울고, 물은 본래 소리가 없는 것인데 바람이 뒤흔들어서 소리 내어 운다. 물이 높이 솟아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 물을 격동시켰기 때문이고, 물이 세차게 흘러가는 무엇인가. 그 물살을 막았기 때문이며, 물이 펄펄 끓어오르는 것은 그 밑에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쇠나 돌도 본래 소리가 없지만 무엇인가 그것을 쳤기 때문에 소리 내어 우는 것이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도 또한 그러하다. 마음 가운데 마지못한 것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말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노래를 읊을 때에는 그리워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고, 사람이 울 때에는 가슴 아픈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무릇 입에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은 모두 평온한 상태를 얻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소리 가운데 정수인 것이 말이며, 문사(문학)는 말 가운데에서도 정수인 것이다. 특히 그 잘 우는 자를 골라 그를 빌려서 운다.

 

() 나라가 쇠했던 때 공자는 천하를 제자와 함께 주유하면서 인의도덕으로 크게 울었고, 전국시대 제자백가들이 각각의 학설로써 크게 울었으며, 당대(唐代)에 이르러서는 당시(唐詩)의 선구자 진자앙(陳子昂)을 비롯한 문사가 교묘하기로 소문난 소원명(蘇源明), 충의와 문장으로 이름난 원결(元結), 당대 제일의 시인 이백과 두보, 그리고 스물아홉이라는 짧은 삶을 마쳤던 이관 등이 제각기 타고난 제주로써 당대에 한바탕 울렸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한유는 사람들이 문학을 창작하는 동기가 이 평온한 상태를 얻지 못한 것(不平)’에서 출발하며, 그 내용 또한 평온한 상태를 얻지 못한 것(不平)을 위주로 한다고 주장한다. 한유는 부득이한 것이 있기 때문에 소리를 낸다고 설명하며 전자의 예를 들고 있다.

한유는 국가의 번성을 노래하는 화평의 소리에 무게가 주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스스로 자신의 불행을 울게 하는(鳴其不幸)’데 더 무게가 주어진다고 보아지는데, 이는 한유의 글에서 기쁘고 즐거운 말은 작품이 뛰어나기 어렵고, 괴롭고 힘든 말은 작품이 좋아지기 쉽다라고 하여 곤궁함을 표현한 작품이 더 훌륭해지기 쉽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옛날부터 역사가들은 비운으로 죽었거나 재난으로 최후를 마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과 상통되는 것일까?

춘추를 지은 공자는 인생 자체가 불행하였고, 사기열전을 쓴 사마천은 죽음보다 더한 궁형(宮刑)을 받았으며, 춘추좌씨전을 쓴 좌구명(左丘明)은 장님이 되었고, 한서(漢書)를 쓴 반고(班固)는 옥사를 당하고 말았다.

한유는 역사를 쓰는 자야말로 사람으로부터 재난이 없으면 하늘로부터의 형벌이 있으므로 어찌 두려워하지 않고 가볍게 쓰겠느냐는 생각을 갖고 최상의 방법으로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자세를 가졌다.

이것은 한유가 사관으로 있을 때의 일로서 자신의 생각을 밝힌 내용이다.

다음의 시는 아이들에게 보여주며(示兒)라는 시 내용이다.

 

내가 처음 수도 장안에 있을 때는

한 묶음의 책만을 지니고 들어왔노라.

고생하고 노력한 지 30년 동안에

그 대가로 이 집 한 채 갖게 되었노라.

이 집이 어찌 화려하다 하겠냐마는

나에게는 넉넉하고 여유가 있노라.

중당만은 높고도 또한 깨끗하니

사철마다 고기와 채소로 제사지내니라.

문 열고 들어오는 사람 누군지 물으면

대부 같은 높은 신분 아님이 없노라.

관직이 높은지 낮은지 모른다 하더라도

옥 장식 띠에 황금빛 물고기 달렸느니라.

그 손님들 하는 일을 물어보면

관 높이 쓰고 요순의 정치 논하느니라.

술자리 끝나고 할 일 없이 무료하면

바둑이나 장기 두며 즐기기도 하느니라.

대체로 이러한 자리에 모이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국가의 중추적인 인물들이니라.

아아! 자기 스스로 수양하지 않으면

하는 일 평범한 사람과 같을 것이니라.

어떻게 이와 같은 자리에 앉아서

조정의 학자들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이 시로써 아이들에게 보여 주며

그 처음 마음을 잊는 미혹됨이 없기를.

 

한유가 이 시를 지은 것은 속물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지난날의 고생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였다. 마흔 여덟의 나이에 비로소 장안에다 집 한 채를 마련했으니 가족을 거느린 가장으로서는 전쟁을 치르듯 살아온 삶에 있어 큰 행복이었으리라.

한유는 식솔들을 챙기기 위해서도 벼슬길을 원했으니 시험 결과 두 번째 낙방하여 절망에 빠져 지은 시가 있다.

 

임금님의 대궐문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음이

권세와 이익을 쥔 사람들이 서로를 추천하기 때문이네.

글 일는 나그네에게 묻노니

무엇을 하고자 집안에 있는가?

머리를 들어봐도 좀처럼 대답할 수 없어

눈을 감고 잠시 스스로 생각에 젖어 보네.

어느덧 16이란 세월이 지나갔건만

언제나 추위와 굶주림에 괴로웠네.

벼슬길 끝내 멀어지고

살쩍은 까닭 없이 줄어들었네.

허유가 은거했던 영수의 물은 맑고 또 고요하며

기산 또한 평탄하면서도 평온하다네.

지금 마땅히 그곳으로 갈 것 같으면

혼자 중얼거리며 불평할지언정 의심스런 생각은 없겠지.

 

이 시에 나오는 영수(潁水)와 기산(箕山)은 허유(許由)라는 은자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요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맡기고자 했지만 허유는 오히려 더러운 말을 들었다 하여 영수의 물가에서 귀를 씻고 기산 기슭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허유처럼 한유 자신도 은거 생활을 하고자 결심한 시로 해석될 수 있다.

그 후 한유는 기행시 산석山石이란 시를 짓는다.

 

산의 돌 울퉁불퉁 험준하고 가는 길이 좁아서

황혼녘에 산사에 다다르니 박쥐들이 날아드네.

본당 오르는 섬돌에 앉으니 방금 내리 비 흡족한 듯

파초잎은 커다랗고 치자꽃은 탐스럽구나.

스님은 옛 벽의 불화가 좋다고 말하면서

불빛을 가져와 비추는데 희미하게 보이네.

평상 펴고 자리 깔고 밥과 찬을 내놓는데

거친 밥과 찬이라도 주린 배 채우기 족하네.

밤이 깊어 조용히 누우니 온갖 벌레 잠잠한데

밝은 달 산마루 올라와 방문으로 달빛 찾아오네.

날이 밝아 홀로 길 떠나니 길이 보이지 않아

들락날락 오르락내리락 안개 속을 헤쳐 나아가네.

산은 불고 개울 푸르러 그 빛깔 찬란하고

수시로 보이는 참나무와 떡갈나무 열 이름이 넘네.

흐르는 물가에서 맨발로 개울의 돌을 밟으니

물소리는 졸졸대고 바람은 옷깃을 불어 올리네.

인생이 이와 같으면 스스로 즐길 만한 것인데

어찌 하필 구속되어 남에게 고삐를 잡히는가?

아아! 뜻 같고 같은 몇 안 되는 내 친구들아

어찌하여 늙어가며 아직도 돌아가지 않는가?

 

이 시의 결말은 자유롭게 은거 생활을 갈망하고 꿈꾸는 한유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한유의 이러한 시를 공대의 문호인 동파 소식(蘇軾)은 남계라는 곳에서 술에 취해 옷고름 풀고 개울물에 잠그며 놀 때 읊조리며 즐거움을 만끽했다고 한다.

한유는 사람들에게 이익과 은택을 베풀어 당대에 명성을 빛내고, 조정에 앉아 백관을 임명하고 해임하며 천자를 보좌하여 명령을 내리는 대장부의 생활을 풍자하고그러나 대장부가 때를 만나지 못했을 때의 은자 생활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가난하게 살며 산야에 묻혀 살면서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기도 하고, 무성한 나무숲에 앉아 하루를 보내기도 하며, 맑은 샘물에 몸을 씻어 스스로 깨끗하게 하기도 하오. 산에서 나물을 캐면 맛이 좋아 먹음직하고, 물가에서 낚시질을 하면 신선하여 먹음직하오. 행동하는 데 있어서 정해진 일과가 없으니 오직 편한 대로 따를 뿐이오. 앞에서 칭찬을 듣는 것이 어찌 뒤에서 비방을 듣지 않는것만 하겠소. 일신을 편하게 하는 것이 어찌 마음에 근심이 없는 것만 하겠소. 거마(車馬)나 복식(服飾)에 얽매이지 않고, 칼이나 톱에 잘리는 형벌도 받지 않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지 어지러운지도 알 바 아니며 면직이나 승진 소식도 들리는 바 없으니, 이러한 일들은 대장부로서 때를 만나지 못한 자가 할 일이오. 내가 그렇게 하고 있소.

 

한유는 이원의 입을 통해 은자의 생활을 묘사한 뒤 이원이 반곡(盤谷)으로 은거하고자 돌아갔기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써주었다. 이원은 농서(隴西 지금의 감숙성 농서현 동남쪽) 사람으로 801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은거하러 돌아갔다.

 

반곡 안은 그대의 집이요

반곡 땅은 그대의 땅이로다.

반곡의 맑은 샘물은 몸 씻고 물가 따라 거닐기 좋은 곳이로다.

반곡의 이 험한 곳, 누가 그대 거처 차지하려 다투겠는가?

그윽하고 깊숙하면서도 넓어서 사람 살기에 좋고

길은 구불구불 굽어가는 것 같더니 제자리에 되돌아오네.

! 반곡의 즐거움이여! 그 즐거움 다함이 없네.

범과 표범도 발길 멀리하고, 교룡도 달아나 숨어버리며

귀신도 수호하여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꾸짖어 막네.

먹고 마시며 건강하고 장수하네.

부족한 것 없으니 무엇을 바라리오?

내 수레에 기름 치고 내 말에 먹이 먹여

반곡에 가서 그대 따라 내 생명 다하도록 유유자적 할거나.

 

소식(蘇軾)은 이 문장을 두고 극구 칭찬하면서 당대에는 문장다운 문장이 없다. 오직 한퇴지의 한 편만 있을 뿐이다. 평소 이 작품을 모방하여 한 편 짓고 싶어서 늘 붓을 잡았다가 놓고는 스스로 웃으며 그냥 두어서 한퇴지를 독보적인 존재로 남게 하는 것이 더 낫겠다

한유는 낙양 주위를 유람하면서 은거의 생활을 꿈꿔 보았지만 실제로 은거하거나 은자가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한유는 시와 문장 두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작가였다. 하지만 그의 시명(詩名)은 오히려 문명(文名)에 가려져 있다 할 수 있는데, 한유의 시를 두고 이백과 두보에 견줄 만하다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를 시인의 대열에서 탈락시켜야 한다는 이도 있다. 이렇게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즉 한유가 추구한 변화()’ 때문으로 보아야 하는데, 소동파는 이렇게 한유를 평가했다.

 

글씨의 아름다움은 안진경(顏眞卿, 709~785)만한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서법이 파괴된 것도 안진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시의 아름다움은 한퇴지 만한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시법의 변화는 한퇴지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유가 유배 도중에 멱라강에 다다라서 지은 상강에서란 시다.

 

원숭이 슬피 울고 물고기 뛰며 물결 일으키는데

옛날부터 전해 오기로 이곳은 멱라수라네.

개구리밥 쟁반에 가득하나 바칠 곳이 없는데

공연히 들리네, 어부가 뱃전 두드리는 노랫소리가.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 대신인 굴원(屈原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이자 정치가)이 정적(政敵)의 참소로 도성에서 추방되어 동정호 주변을 방랑하다 투신한 곳이 멱라로 지금의 호남성 장사(長沙) 부근에 있는 강 이름이다.

그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이소(離騷)’ 구장(九章)’ 등에서 노래하고 있고, 이 작품들은 다 초사(楚辭)’에 실려 있다. ‘초사가운데는 어부사(漁父0)’ 한 편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어부라는 말은 은자(隱者)고기를 잡는 늙은이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굴원은 자기 한 사람만 깨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다 취해 있다고 말하고 말한다. 그 까닭으로 추방되었다고 어부에게 말하자, 어부는 그렇다면 자신도 술지게라도 먹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취하지 않았느냐고 나무라고 있다. 군자도 세속을 따르랬다는 말과 상통될까? 말하자면 굴원이 여세추이(與世推移)하지 못함을 꾸짖으며 노래와 함께 뱃전을 두드리다 가버렸다는 게 이 작품의 요지이다.

 

다산은 황상의 아버지 황인담에게 취몽재기란 글을 써준 적이 있었다. 황인담은 이름난 술꾼으로 아전 중에서도 이방이었는데,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뜻을 가졌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아전 생활을 하였다.

그는 천성이 착했으나 술을 좋아했다. 술에 절어 사는 그는 다산에게 자신의 집 이름을 취몽재로 지을 생각이니 글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했다.

다산은 그의 부탁대로 취몽재기를 써주었는데 그 내용에 굴원을 언급했다.

 

-굴원은 취한 사람이다. 성을 내어 곧은 말을 하면 반드시 몸을 망치고, 능력을 닦아도 마침내 재앙을 부를 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몰랐다. 비록 취한 바는 달라도 거나하게 크게 취한 사람이다. 때문에 분을 내어 크게 통탄하며 스스로 취하지 않았음을 변명하여 나 홀로 술이 깼다고 말했던 것이다. (중략)

취몽재기를 써주면서 다산은 왜 굴원을 언급했을까? 여기에서 이미 한유가 굴원에 대해 시를 지었을 때 여세추이하지 못한 굴원을 나무랬듯이, 다산 또한 그 취몽재기를 써주면서 술 밖에 모르는 황인담이 몹시 안타까웠지만 취몽의 뜻을 반대로 바꾸어 지어주었다.

 

- 황인담은 파리처럼 바쁘고 돼지처럼 노는 사람에 비하면 오롯이 깨어있는 자라 할 것이다. 돈 한 푼에 파리나 돼지처럼 살지 않으며, 스스로 취몽이라고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맨 정신으로 깨어날 기미가 있는 자이다.

 

다산은 취몽재의 글을 써주면서 황인담의 술에 취해 살다가 꿈속에 죽을 사람이라는 말끝에 깨달음의 세계로 나갈 수 있도록 했다.

 

치원 황상의 은거 생활

황상은 1805년 고성사에서 정학연과 겨울을 나면서 다산에게 주역을 공부할 때 밟는 길이 평탄하니 유인(幽人 :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조용히 숨어 사는 사람)이라야 곧고도 길하다란 말을 듣게 된다. 황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을 떨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이런 황상을 본 다산은 아예 제황상유인첩란 책을 엮어서 건네주었다. 이 글은 황상이 한평생 살아가는 지침서가 되었고, 삶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여기에서 다산은 열복(熱福)과 청복(淸福)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되는데, 열복이란 높은 수레를 타고 비단옷을 입고서 대궐 문으로 들어가 묘당에 앉아 사방을 다스릴 계책을 듣는 것이라고 할 때, 청복은 깊은 산속에서 살며 거친 옷을 입고 거친 짚신을 신으며 맑은 못가에서 발을 씻고 고송(古松)에 기대어 휘파람을 부는 것이 청복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는 그 성품에 따른 것으로 청복이란 무릇 하늘이 몹시 아껴 잘 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복을 얻은 사람은 아주 많으나 청복을 얻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황상은 다산으로부터 청복을 누리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황상유인첩을 통해 알게 되는데, 뒷날 <일속산방>의 경영으로 이어진다. 다산은 황상의 재주를 아껴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권했으나 황상은 유인의 삶을 선택해 <일속산방>을 꾸미고 한평생 시를 쓰고 중국의 4대 시인의 시를 베끼고 장자를 공부하였다.

좁쌀처럼 작은 몸으로 좁쌀 같은 방에서 지내지만 세상사 부귀영화 뜬구름처럼 여기는데, 그러나 그 속에 광대무변한 자족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글 송하훈 (참조 한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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