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정관웅 칼럼니스트와 함께하는 인문학으로 보는 세상 – 신발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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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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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웅 칼럼니스트와 함께하는 인문학으로 보는 세상 – 신발 상징
사람의 발자취를 담은 기록을 이력(履歷)이라한다 , 이력서란 신을 신고 걸어온 역사를 적은 종이라는 뜻

신발을 벗으면 앞 쪽을 향해 가지런히 놓아야 하며 남의 신발을 밟아서는 안 된다.

사람의 발자취를 담은 기록을 이력(履歷)이라고 한다. ()는 신발을 뜻한다. 따라서 취직할 때 흔히 쓰는 이력서란 신을 신고 걸어온 역사를 적은 종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신발이란 사람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옛날 우리 스님들의 신발은 짚신이 기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물조차도 밟히지 않도록 올을 성성하게 만들었다. 최근에는 고무신이 스님 신발의 상징이 됐습다. 스님들에게 고무신은 검약과 무소유정신의 표현이다.

사치스런 신발은 불가하고 출가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의식이 그동안의 신발을 벗고 새 고무신을 신는 것을 볼 때 고무신은 수행자의 삶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인 셈이다.

지난날 일반서민들에게는 더없는 친구였다. 그 고무신 한 짝 때문에 울어야 했고 새고무신 냄새를 맡으며 품에 안고 자기도 했다. 그냥 맨손으로 빡빡 맹물에 씻어 문지방 옆에 세워 놓기만 하면 됐다.

신발은 이처럼 삶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진 기록물이기도 하다. 그 시발은, 우리의 의 발자취는 인간의 의식의 발달에 따라 많이 변화해왔다. 발의 보호에서 의례적, 장식적 목적으로까지 다양한 형태를 갖추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민족이 고무신처럼 질긴 인생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질긴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세월을 고무신과 삶을 함께 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발을 벗고 신을 때는 예절을 잘 지켜야 한다. 신발을 벗으면 앞 쪽을 향해 가지런히 놓아야 하며 남의 신발을 밟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구두 컬렉션처럼 인물로 보는 신발사

월드컵 결승 진출좌절로 안정환은 세계 신발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호기를 놓쳤다. 안정환은 한국이 독일을 이겼을 경우 퓨마에서 특수제작해준 축구화를 관중석으로 던질 예정이었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은 기분 전환과 경기력 향상을 위해 매 경기 다른 농구화를 신었다'고 신발사에 기록돼 있다.

영국의 인도 지배 때 인도인이 영국인 사무실이나 가정에 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했으나 영국인이 인도인의 공간에 들어갈 때는 신어도 무방한 식. 고대 그리스 때는 맨발이냐 아니냐로 노예와 자유민을 구분했고, 14세기 유럽에서는 구두 끝을 뾰족하게 한 크래코가 유행해 왕자는 무한대, 귀족은 60cm, 신사는 30cm, 보통사람은 15cm까지 허용됐다.  또 중세 유럽 부자들이 발뒤꿈치에 물집이나 굳은살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 새 신을 신어주는 하인을 따로 두는 등 신발은 부의 척도였다. 18세기 노동자들은 구두 수명을 늘리려고 뒤꿈치에 말굽 장식을 달았는데 당시 신 한 켤레 값은 반 달치 봉급이었다. 이 시기 최고의 자선사업은 불우한 이웃에게 신발을 사주는 것이었다.

이멜다 여사의 구두 컬렉션처럼 인물로 보는 신발사는 시대를 막론한 화젯거리.

키가 1m60로 아담했던 '태양왕' 루이 14세는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치솟은 가발에 높은 구두만 신어 하이힐 유행을 낳은 경우. 반면 키가 1m93에 달한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평발이기까지 해 백악관 내에서는 카펫 슬리퍼를 신고 일했을 정도로 부츠를 기피했다.

 

  여성에게 신발은 더욱 각별하게 다가간다. 18세기 러시아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생전에 수천켤레의 신발을 소유했고, 영국 헨리 8세의 마지막 아내 캐서린은 결혼한 해에만 마흔일곱켤레의 구두를 사 구설수에 올랐다. 그러나 유년기 발 학대로 성장 후 잘 걷지조차 못한 중국 여인들의 전족 역사는 신발사의 가슴 아픈 장으로 남는다.

  예나 지금이나 신발은 유행의 코드다. 몇 해 전 통굽 슈즈가 유행했었는데 16세기 이탈리아 베니스와 영국에서는 심하면 45cm에 육박하는 초핀이 유행했었다니 유행은 정말 돌고 돈다. 미국의 발명가 찰스 굿이어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의 고무 신소재 발명으로 싸고 편한 스니커즈가 탄생했다. 인류 신발사는 비약적 발전을 이루게 된다.

 

우리나라 신발 이야기

우리나라에 고무신, 운동화, 구두가 보급되기 시작한 건 1910년대 중반부터다. 그 전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짚신을 가장 많이 신고 다녔다. 하지만 권력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은 가죽에 천을 대 만든 갖신을 신었다. 남자들이 신는 갖신의 종류로는 태사혜(太史鞋)와 외코신이 있었고, 여자들은 신코에 구름무늬가 있는 운혜(雲鞋), 당초문이라는 나뭇잎무늬가 있는 당혜(唐鞋), 비단에 수를 놓아 만든 수혜(繡鞋)를 신었다.

이런 갖신을 만드는 장인을 요즘은 화혜장[목이 긴 신발인 화()와 목이 없는 신발인 혜()를 만드는 장인]’이라고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동물의 가죽을 다룬다고 해서 갖바치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아무나 갖신을 신을 수 없었다. 남자의 경우 6품 이상의 고위 관료만 신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사회가 혼란해지고 중인들이 상권을 장악하면서, 돈만 있으면 누구나 가죽신을 신을 수 있게 되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신분 제도가 붕괴되면서 갖신의 수요가 더욱 증가했다. 근대의 종로 부근 사진을 보면 혜전(鞋廛)’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화혜전이 아니라 혜전이라고 했으니, 목이 없는 비단신을 파는 가게다.

1960년대부터 옛 장인들을 취재해 한국일보인간문화재라는 글을 연재했던 예용해(1929~1995) 논설위원은 화장(靴匠)’ 편에서, 근대의 비단신은 조선시대의 갖바치나 그 후손들이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들은 조선시대에 소 도살장이 있어 가죽을 구하기 쉽던 낙산 부근의 동촌(동소문 부근으로, 지금의 혜화동)에 모여살았고, ‘혜전주인이 건네주는 가죽과 재료를 받아 주문 생산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비단신을 만드는 가내수공업소는 약 100여 곳이 있었고, 설날 전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주문이 밀렸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신발 만드는 장인들, 나막신을 만들던 가내수공업 현장을 스케치한 연필그림이다. 그림 왼쪽 선반 위에 나막신이 보이고, 오른쪽 앞 장인이 작업을 하는 신발도 나막신이다. 속도감 있는 연필 묘사로 현장감을 생생하게 살린 키스의 스케치 실력이 놀랍다.

엘리자베스 키스, 신발 만드는 장인들, 종이에 연필, 크기 미상, 1919~1920년 초 추정, 소장처 미상

문명이 발전을 하면서 계급사회가 되면서 신발의 종류도 다양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급의 상징으로 서서히 바뀌게 된다. 사극에서 많이 보면 알겠지만 임금이 신는 신발, 버선등은 화려하지만, 평들의 신발들은 거칠고 이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편하지도 않은 신발을 신고 최소한 발의 보호를 위해 만들어 신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물론 신발을 만드는 갖바치들은 그래도 좋은 신발을 신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어쨌든 신발은 튼튼하고 편하고 안전하고 예쁘고 권위 있는 모양과 용도로 발전을 해왔다. 우리의 가장 밑바닥인 발바닥이 편해야 모든 것이 편해지는 것이다.

나무 신발

신발의 편함을 추구하기보다는 거의 예술품에 가까운 나무로 만든 신발이다. 만드는 장인의 노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신기에는 많이 아프고 딱딱하고 무겁고 통풍도 안 된다는 것이 문제다. 정성과 노력에 비해서 편리함을 추구하기에는 좀 불편했을 것이다.

짚신

지금도 시장에 가면 가끔 보인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부모님보다 편하게 신으면  안 된다고 상중에는 이런 신발을 싣는 상주들도 있긴 했었다. 견고하고 오래 신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딱딱함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신발이고, 농사를 많이 짓다 보니 쉽게 재료를 구하고 만들어 신었다.

당혜

이 신발은 그래도 고급스러 보이고 신고 싶은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부인들이 신은 가죽신이고 조선 말엽까지 신었다.

고무신

 고무신은 많이 알고 있다. 아마 근대 문명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서민들의 신발이었다. 한때 어렸을 때 많이 신곤 했었다. 맨발에 신으면 땟자국과 더불어 땀이 차면 미끌어 지고, 바닥이 미끌어면 쭉 찢어지기도 했던 추억의 검정, 흰 고무신이다.

꽃신

여성들은 한복과 더불어서 이렇게 예쁜 꼬까신을 신고는 했다. 참으로 고운 꽃신이었다. 편안하고 아프지 않고 걷기 쉽게 많은 연구을 통해서 만들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신발은 우리 삶에서 엄청 중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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